최근 일베 논란과 함께 떠오르는 매카시즘(McCarthyism)
요즘 518을 전후 해 일부 종편방송과 나이어린 일베회원들의 무분별한 활동이
사회문제로 떠올랐었다. 지각있고 양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개탄의 목소리와 탄식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라디오를 듣가가 앵커가 말했던 '매카시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적 있는데 싶을텐데 이 말은 지난 2001년
미국의 911테러 이후 조지 부시 행정부가 보여준 일련의 강경분위기 속에서
다시 한번 흘러나온 말이기도 했었다.
911테러 이후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지는 보복 작전과 애국법. 부시독트린 등
많은 용어들이 새롭게 만들어졌고 럼즈펠드 국방부장관을 중심으로 '충격과 공포'작전이
수행되는 내내 뒤를 따라다니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매카시즘'이었다.
결국 911테러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오사마 빈라덴은 마국의 새로운 정부
버락 오바마 정부에 들어서 치밀한 군사작전과 함께 빈라덴을 찾아내 사살하고 모든
상황은 일단락 된 듯 하다. 물론 911테러 자체 음모론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빈라덴을 둘러싼 의혹과 진실공방이 계속 되었지만 여하튼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과거 50년대 미국사회를 강타했던 '매카시즘'을 떠올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래서 요즘 한국사회를 보노라면 마찬가지로 일베 등 일부 보수층의
지나친 활동을 지켜보면서 '매카시즘'이란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매카시즘
McCarthyism
요약: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반공사상(反共思想)으로, 현재에는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집단에서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매카시즘은 미국 위스콘신 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당시 상원 국내치안분과위원장이었던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Joseph R. McCarthy)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조지프 매카시
(조셉 매카시)
Joseph Raymond McCarthy
정치인
1908년 11월 14일(미국) ~ 1957년 5월 2일
학력:마케트대학교 법학 학사
경력:1950.02 미국 비미활동위원회 위원장
1947.01~1957.03 미국 위스콘신주 공화당 상원의원
미국 위스콘신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R.매카시의 이름에서 나온 말로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폭탄적인 연설에서
발단한 것이다. 1949년 이래 수년에 걸쳐 매카시가 상원의 비미(非美)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행한,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국자본의 시장이던 중국의 공산화와
잇달아 발생한 한국의 6 ·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국민으로부터, 그의 주장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이 발언이 발단이 되어 미국은 수년 동안 이에 대한 논란으로 들끓었다.
매카시는 국무부의 진보적 성향을 띤 100여 명에 대해 추방을 요구했으며 많은 지도층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였다. 특히 1938년 하원에 설치된 비(非)미활동위원회를
중심으로 펼쳐졌는데, 반대파 정치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는 것은 물론,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과 트루먼 대통령의 페어딜 등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진보주의 정책까지 공산주의와 연계시켜 심판대에 올렸다.
매카시 여파는 또 예술계와 언론계에까지 미치면서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를 낳았다.
할리우드 영화계와 방송계의 작가ㆍ감독ㆍ연예인 가운데 수십 명이 공산주의자라는
멍에를 쓰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매카시즘이 먼저 공격목표로 삼은 것은 중국정책에 영향력이 컸던 외교관,
국무성 및 중국통 정치학자 오언 래티모어, 국제법학자 제삽 등이었는데, 대통령 H.S.트루먼도
공산주의자에게 약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다.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의 보수 강경 분파가 전시 총동원체제로부터 전후체제로 순조롭게
체제를 재편성하고 헤게모니의 기반을 다지고자 의도적으로 일으켰던 이 공산주의자 사냥은
미국 국내외로부터, 심지어 당 안에서도 격렬한 비판에 부딪혀 국제관계에서의 긴장 완화와
더불어 점차 수그러들었고, 매카시는 공무원과 육군장교를 공산주의자로 고발한 사건을
계기로 1954년 12월 육군에 도전한 이 일들이 결국 치명상이 되어서
마침내 1954년 상원의 사문결의(査問決議)에 의하여 실각하였다.
당시 국무장관 덜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다.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매카시는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도 그가 말한 공산주의자가
누구인지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
그의 공격적 발언은 갈수록 심해져서 마침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 지도부, 육군 장군들까지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으나,
1954년 국회 청문회에서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발언으로 판명되었다. 청문회 당시
육군측 변호사들은 집요하게 추궁했는데, 이에 대해 매카시는 흥분하며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고 당시 이 모습을 36일간의 텔레비전 생중계로 본 미국 국민들은 더 이상
매카시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1954년 12월 상원은 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의제로 올려, 67대 22로 그에 대한 비난을
의결하였다. 미국 민주당에서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를 제외한 의원 전원이 찬성
하였다. 케네디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유로 불참하였는데, 실제로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참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한편 매카시 의원의 소속 정당이었던 미국 공화당에서도 상당수 의원들이 찬성하여
비난 결의안이 통과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상원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매카시는 미치광이 혹은 간신모리배 등에 비유되었다. 이에 크게 상심한 그는
이전부터 앓아오던 두통과 조증을 해소하고자 더욱 술에 의존하게 되면서 알코올 중독의
나락에 빠지게 되었다. 상원의원의 직위는 유지했으나, 거의 활동은 할 수 없었고,
공화당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건강을 잃어 1957년 만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식에는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양당의 여러 의원들이 참석하였다.
매카시는 히틀러와는 달리 아무런 비전도 가지지 못하였으나, 보기 드문 선동가였다.
광적이다시피 집착하는 일방적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와 지나친 반공주의는 결국1950년대
미국을 매카시즘 광풍으로 몰아넣게 되는데 그가 미친 영향은 미국의 대외적
위신이나 지적(知的) 환경 등에 끼친 손해는 막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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