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몬스터 류현진 VS 코리안 특급 박찬호
후반기 첫 등판에 나선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이 시즌 8승 달성을 위한 도전에 나섰다.
'코리안 몬스터'라 불리우는 류현진과 과거 '코리안 특급'으로 불리웠던 박찬호의 공통점은 일단
두 사람 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활약하고 LA 다저스에서 뛰었다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오늘 류현진의 경기중계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도 집중돼고 있고 해서 이 두 사람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지난해 11월 말 박찬호는 파란만장한 현역 야구선수 생활에 은퇴를
선언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뒤를 이어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이 저력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 23일 시즌 8승을 달성할 것인지의 여부에 큰 관심이 집중돼고 있다.
류현진은 23일 오전 8시(한국 시각) 캐나다 토론토 로저스센터에서 열린
2013시즌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해 2회까지 3피안타
무실점을 기록 중이다. 타선의 지원을 받아 4-0으로 앞선 2회엔 선두타자 마크 데로사에게 안타를
내주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으나 이후 흔들리지 않고 3명의 타자를 범타로 처리하는 안정감 있는
투구를 펼치며 일단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다. 류현진의 경기중계를 끝까지 지켜보아야 겠지만,
현재 분위기로 봐서는 류현진의 시즌 8승 달성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박찬호를 떠올리면 따라 붙는 수식어가 많다. 기복도 심했고 강등을 당하거나
부진과 호조를 반복하고 팀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IMF 당시 실의에 빠진 대한민국 국민의 희망이 되어 주었던 '코리안 특급'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경기 시작전 모자를 벗어 관중에게 깍듯이
인사하던 모습은 현지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한국민으로서 뿌듯한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었다. 잘 생기고 서양인 못지 않은 덩치에 LA다저스 유니폼이 썩 잘 어울렸던 당시 모습을
기억한다. 솔직히 몬스터 류현진에 비하면일단 뽀대 하나만큼은 정말 보기 좋았다.^^;
하지만 박찬호의 화려함도 잠시. 검색어에도 나오는 '박찬호 이단옆차기'사건은
큰 위기를 안겨주기도 했었다. 연일 지금의 류현진 처럼 국민적 관심사가 대거 집중되던 가운데
터진 이 사건이 각종 일간지 1면을 장식하고 전 세계적으로도 대서특필되었던 이단옆차기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었다. 이후 마냥 잘 나갈 것만 같았던 박찬호가 보일듯 보이지않게 심한
마음고생을 하던 것들과 이어진 깊은 슬럼프들도 어찌보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의 선수생활에
있어 그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정서가 매우 예민한 편이었다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제 박찬호는 은퇴를 했고 그야말로 몬스터 류현진이 그 뒤를 이어 나가고 있다.
박찬호 이후 김병현이나 최희섭, 추신수 등 많은 한국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지만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만이 코리안 특급 박찬호를 대신하고 있는 듯 하다.
류현진
야구선수
출생1987년 3월 25일(인천광역시)
신체188.9cm, 115.6kg
소속팀LA 다저스 (투수)
학력대전대학교 사회체육학
수상2010년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인천 출신으로 동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6년 신인 드래프트 2차 1순위(전체 2순위)
지명을 받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등번호는 15번이었으나 한화 이글스에서
15번을 달고 오랜 기간 활동했던 투수 구대성이 미국 메이저 리그 뉴욕 메츠에서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99번으로 변경되었다. 그 때 그는 별 생각 없이 99번으로 변경했으나
이후에는 소속 팀의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재현을 위해 99번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재현하지 못했다고 한다.
프로 야구 데뷔 첫 해인 2006년 다승, 평균 자책, 탈삼진 1위로 투수 3관왕에
오르며 신인상과 최우수 선수상을 동시에 석권했다. 신인이라고 하기엔 믿기 힘든 뛰어난
활약으로 '괴물'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데뷔 첫 해 한국시리즈에도 등판하였다.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2006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지만 아시안 게임에서는
부진했다. 2006년 4월 12일 잠실 LG전에서 선발로 나와 10개 탈삼진을 잡으며 프로 데뷔 첫승을
거두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본선에 국가 대표로 참가해 예선전인 캐나다 전과 결승전(대 쿠바)에
선발 등판했고, 캐나다전 완봉승을 포함, 17 1/3 이닝 동안 10피안타 13탈삼진 2실점 (평균 자책 1.04)의
뛰어난 성적으로 야구 국가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하며 병역도 해결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하였고, 2009년 3월 6일 벌어진 아시아 라운드 첫 경기
대만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3이닝 피안타 1개 탈삼진 3개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SK 와이번스의 김광현과 LG 트윈스의 봉중근과 함께 한국 프로 야구 3대 좌완 에이스로
꼽힌다. 그러나 사실 그는 공을 던질 때 외에는 오른손잡이다.[5] 야구선수 중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좌투우타이다. 2010년 아시안 게임 야구 국가대표로 출전하였으며 대만과의 결승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철벽 마운드를 구축,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큰 공헌을 세웠다. CJ 마구마구 일구상 최고투수상,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스포츠토토 uke6 . com 인터넷베팅 올해의 상 올해의 투수상,
조아제약 프로야구 대상 최고 투수상, 제16회 2010년 아시안 게임 야구 금메달,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최다탈삼진상,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방어율1위투수상,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상을
수상하고 방어율 1.82 전적 16승 4패 탈삼진 187개 등을 기록했다.
2012년 11월 9일 메이저리그 포스팅 시스템 기간이 종료된 결과 2573만7737달러33센트
(한화 약 279억8978만원)의 포스팅 응찰액을 받았으며[7] 최고 금액 입찰팀은 LA다저스로
밝혀졌다. 마침내 같은 해 12월 10일, LA 다저스와의 협상 끝에 계약 기간 6년 동안
총액 3600만달러(한화 약 390억원)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하였다.
박찬호
전 야구선수
출생1973년 6월 29일(충청남도 공주)
신체185cm, 95kg
소속사팀육십일
가족배우자 박리혜, 딸 박애린, 박세린
학력한양대학교 경영학 학사
1973년 6월 29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으며, 공주 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
육상선수에서 야구선수로 전향하였다. 이후 공주 중학교 3학년 시절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고,
공주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학교에 진학하였다. 한양대 재학 중이던 1994년 계약금으로
120만 달러를 받고 LA다저스에 입단,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였다.
한국에서는 등번호로 줄곧 16번을 달았으나 1994년 입단 당시 투수코치였던 론 페로나스키가
16번을 쓰고 있어 16을 뒤집은 61을 달게 되었다. 그토록 달고 싶어 하던 16번은
페로나스키 코치가 그만두던 1995년에 입단한 노모의 차지가 되었다.
박찬호는 1997년부터 선발투수로 활약하여 2001년까지 5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거뒀다. 1998년에는 방콕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참여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어
병역면제가 되었다.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였던 그는 2002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5년간 총액 6500만 달러(옵션계약에 의해 실제는 7100만 달러)를 받고 텍사스로 이적,
연평균 1300만 달러(약 150억 원)를 받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상으로 2002년 9승, 2003년 1승, 2004년 4승 등 부진한 성적을
나타냈다. 미국 언론은 박찬호의 텍사스 입단을 역대 가장 실패한 계약으로 꼽으며, 이른바
'먹튀'로 지목되는 불명예도 안았다. 2010년 말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 진출을 선언한
박찬호는 2011년 시즌 7경기에 등판해 1승5패 방어율 4.29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는 데
그쳤고, 결국 10월 24일 방출되었다. 박찬호는 2011년 12월 20일, 1년간 한국야구위원회
(KBO) 규약상 최저 연봉인 2400만 원에 한화 이글스와 계약하였다.
지난 1994년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지 17년 만에 한화로 이적하며,
국내 무대로 돌아온 박찬호는 구단에 연봉과 관련된 모든 것을 위임하였다. 이에 따라 한화는
4억과 옵션 2억을 포함, 총 6억 원 범위 내에서 유소년 및 아마추어 야구 발전을 위해
기부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등번호는 메이저리거 시절과 같은 61번을 달았다.
그리고 박찬호는 2012년 11월30일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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