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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때리는영화/아시아영화

7인의 사무라이, 세계화를 앞당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최고 걸작

7인의 사무라이, 세계화를 앞당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최고 걸작

 

7인의 사무라이는 진작부터 꼭 보고 싶던 영화였음에도 번번히 기회를 놓치다가

2004년 극장개봉마져 놓친 직후에 DVD를 구입하고서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두어 편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앞서 포스팅 했던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다. 1954년 작품으로

'라쇼몽'(1950) 이후 이미 세계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알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 영화는 헐리우드판 '황야의 칠인'으로 리메이크 되어 성공한 사례가 있다. 이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나라에서 '7인의 사무라이' 플롯을 그대로 옮겨다가 영화를 만든 사례가 셀 수 없이 많다.

 

 

 

 

그만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는 전 세계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일본문화를 알리는데 확실하게 일조했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우리가 흔히 '한류'라고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던 것처럼 당시 세계는 '일본문화', '일본 사무라이'에 열광할 정도로 

아주 일찌감치 부터 큰 붐을 일으켰다. 때문에 이처럼 잘 만든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했던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친화적으로 바뀌며 확실한 문화콘텐츠를 형성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요즘 우리의 '한류'는 갈수록 퇴색하는 분위기라 안타깝다.

일관된 정부지원도 없고, 정권이 바뀔 때 마다 흐지부지하니...뭐.-_-;;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 같은 영화를 통해 일본문화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어쨌든 명백한 사실이다. 때문에 '가장 일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말과도

일치한다. 우리가 보통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하는 이 말은 사실 일본이

먼저 사용했다. 우리가 '친일파'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사실 음성적으로 여러면에서 일본의 문화를

따라한게 엄청나게 많다.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에(위로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 등 공산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미국문화를 양성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일본문화는 음성적으로 흡수하고

영향받았던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당시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는 문화, 예술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파되어 마치 우리가 그런 말을 먼저 쓰게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어쨌든, 가장 한국적인게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도 맞는 말이기는 하다.^^

 

 

 

▲ '칠인의 사무라이'(Seven Samurai, 1954) HD trailer

 

'7인의 사무라이'가 일본영화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분명 아시아를 대표하는 감독이었고, 알고보면 헐리우드에서도 그의 영화와

작품세계에 대해 광적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마력이 분명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오늘날

아키라 감독만의 독특한 영화세계는 수많은 영화인들에게 은연중에 너무도 많은 영향을 미쳤던게 사실이고,

여전히 일본의 문화예술작품만이 가진 독창성은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례로 워쇼스키 남매가

연출했던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통해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유명하다. 한국의 박찬욱 감독이 만든 '올드보이'도 사실은 일본만화가 원작 아니던가.

그만큼 일본이라는 섬나라가 가진 독특한 색채와 정신세계는 어쩌면 세계화로 가는데 있어

오히려 더 유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사무라이 영화들은 대게 사실적 폭력묘사와 극적인 효과의 극대화에

있었다. '7인의 사무라이'나 '요짐보' 등에서 볼 수 있는 결투나 전투장면들은 그 때까지 전통적으로

은유적 표현을 해왔던 일본 사무라이 극을 서구적인 표현방식에 입각해 사실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때문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이후의 수 많은 사무라이 영화들에서는 팔다리가 잘리고 피가 튀는

자극적인 장면들이 일상화 되어 나중에 그는 이러한 경향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는 개별 무사들이 하나둘 모이게 되는 과정도 오밀조밀한 매력이 있으며  대장

(시무라 다케시, Takashi Shimura)과 개개의 무사들이 치밀하게 작전을 구상하여

마적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장면은 뒤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게 펼쳐진다.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서 사무라이 액션의 사실적인 묘사 외에 또 다른 특징을 꼽자면, 바로

휴머니즘과 유머이다. 그의 시대극을 제외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답을 찾는 영화들

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영화들이 전개되는 두가지 축이 휴머니즘과 유머인 것이다. 이를테면

현명한 노인들의 살아가는 방식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울 수 있다거나, 밑바닥에 등장하는 최하층민들도

칠인의 사무라이에 나오는 몰락 무사들도,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 나오는 공주와 부하들도 모두 유머를

안다. 이러한 유머는 활극과 현대극 양쪽에서 스토리 전개의 긴장감 속에 여유를 불어넣는

역활을 하게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로 통하는 미후네 토시로(Toshiro Mifune) 역시

라쇼몽 이후 '7인의 사무라이'에서 희극적 인물 '기쿠지요'역으로 나와 이런 활력을 불어넣는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망원렌즈를 즐겨 사용하여 프레임을 평면적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카메라를 배우에게서 떨어뜨리는 것이 배우들의 연기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여러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방법을 통해 여러 각도에서의 화면을 잡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화면의 분위기를 날씨로 많이 조절하기도 했다. 7인의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빗속의 전투장면이나, 거미집의 성에서 보았던 안개같은 것들도 다 이러한 연출방식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도 그렇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이동할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일관되게 움직이는 것도 특징이다.

 

 

 

 

 

'7인의 사무라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세계를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수준 높은 흑백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던 농민과 영광스러운 전성기를

다 보낸 사무라이들은 이전만 해도 어울릴 수 없는 갈등 관계이었지만 구로사와의 휴머니즘으로 절묘하게

융화된다. 또한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 처럼 '전쟁에서 이긴 것은 사무라이가 아니라 농민이다'에서도

구로사와의 휴머니즘과 철학, 진정한 의로운 존재에 대한 대중들의 갈망을 엿볼 수 있다.

 

 

 

 

 

7인의 사무라이는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실현하는 사무라이의 존재에 대한 일본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그것이 비록 '사무라이'라는 일본 특유의 무사이기는 했지만, 어느 국가 어느

사회건 반드시 존재하는 개인 또는 집단 간의 갈등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세계인들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칠인의 사무라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특유의

연출력이 돋보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관련 포스팅: 라쇼몽(羅生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Persona) 미후네 토시로

 

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 Seven Samurai, 1954

일본
상영시간:205분
국내개봉:2004년4월16일

감독:구로사와 아키라(Akira Kurosawa)

 

출연

미후네 토시로(Toshiro Mifune), 시무라 다케시(Takashi Shimura),
츠시마 케이코(Keiko Tsushima), 시마자키 유키코(Yukiko Shimazaki),
후지와라 카마타리(atari Fujiwara), 카토 다이수케(Daisuke Kato),
키무라 이시오(Isao Kimura), 치아키 미노루(Minoru Chiaki) 외

 

수상
오스카 후보 : So Matsuyama(미술감독), Kôhei Ezaki(의상),

베네치아 영화제 : Akira Kurosawa(은사자상), 황금사자상 후보

 

 

 

▲ 7인의 사무라이- Seven Samurai (1954) HD trailer1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일본 감독이다. 그의 긴장감 넘치고

설득력 있는 인간적 서사시 '7인의 사무라이'는 오래도록 인기를 누리며 가장 많이 상영된 걸작이다.

구로사와의 작품을 모델로 한 서부영화로 1950년 작 '라쇼몽'을 리메이크한 '아웃레이지'(1964)와,

1961년작 '요짐보'를 그대로 옮겨놓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획기적인 스파게티 웨스턴

'황야의 무법자'(1964)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깊이는 덜하지만 '7인의 사무라이'를

리메이크한 '황야의 7인'이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구로사와는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영감을 얻어 일본의 중세를 판타지적 세계로 표현함으로써

검술에 중점을 두던 일본 시대극의 제한된 전통에서 대담하게 벗어났다. '7인의 사무라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경이로운 액션과 희극적 사건, 재난과 사회 드라마, 아름다운 인물, 의무와

욕망의 갈등은 철저히 사실주의적 시선으로 다루어졌다.

 

 

 

 

 

16세기 중반 일본은, 중앙 정부의 세력은 약해지는 반면 지방 정치 세력은 점점 강해져

내분이 잦았다. 잦은 내분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산적 무리들이 매년 강간과 살인, 도적질을

일삼는 침략에 시달리던 한 가난한 농촌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로닌'

(주인 없이 떠도는 사무라이)을 고용한다. 보수로 줄 거라고는 약간의 쌀뿐인 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고용할 칼잡이를 찾아 나섰는데, 운 좋게도 아무 대가를 받지 못하더라도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명예롭고 동정적인 캄베이(시무라 다카시)를 만난다.

 

 

 

 

이 영웅적 인물은 음식이나 재미를 얻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싸우겠다는 다섯 명의 떠돌이를

더 모아오고, 그중에는 마음씨 좋은 노인과 촉촉한 눈망울의 젊은 수련생, 거의 말이 없는 검술의

대가도 포함되어 있다. 성급하고 충동적인 젊은 농부 기쿠지요(미후네 도시로)는 그 무리에

끼려다가 노련한 사무라이에게 거부당하지만, 캄베이에게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일념으로 사무라이처럼 위장하고 그들을 따라다닌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지만 점점 그 사이에 유대가 형성되고

사랑도 피어나고 아이들은 영웅들을 잘 따르게 된다. 캄베이는 뛰어난 전략을 세워 침략자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고 결국 그들을 무찌른다. 영화는 필요 없는 설명은 생략하고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진행되는데 이런 방식은 신비감을 유발하면서 불안감을 유지한다. 예컨대 농부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사무라이를 찾으러 다니고 캄베이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과정은 짧은 쇼트와 빠른

편집으로 이루어진다. 시각적 요소와 정서적 요소가 압도적인 장면도 곳곳에 등장한다.

 

 

 

 

불타는 방앗간에서 죽어 가던 여인이 혼신의 힘으로 기어 나와 자기 아기를 기쿠지요

(미후네 토시로)에게 건네준다. 그는 충격상태에서 냇가에 주저앉아 흐느끼며 울부짖는다.

“이 아기가 나야. 내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었어.” 그의 뒤에는 물레방아가 불붙은 채 돌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결말이다. 세 명의 생존자가 동지들의 무덤을 보살피는 동안

지난 일은 다 잊은 듯 희희낙락하며 모내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구로사와 아키라
黑澤明(흑택명)くろさわ あきら
Kurosawa Akira
영화감독
출생:1910년 3월 23일(일본)
사망:1998년 9월 6일
신체:182cm
데뷔:1943년 스가타 산지로

 

 

 

 

도쿄 부 에바라 군 오이 정(현:도쿄 도 시나가와 구)의 학교법인일본체육회(현재 일본체육대학)의

부속지역에서 4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키타 현 나카센 정 (현:다이센 정) 출신의

전직 군장교, 체육교사, 학교법인일본체육회이사였다. 그는 중학교 졸업후 그림공부를 했는데 권위있는

미술상도 받고 일본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에도 참가할 정도로 열정이 있었다. 1936년에

도호의 전신인 PCL에서 조감독으로 영화산업에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그는 야마모토 가지로(山本嘉次郞)의 조감독으로 일하던 1943년에 '스가타 산시로'로

데뷔하였는데 조감독으로 일하던 도중에도 각본가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초기작들은 전쟁 중인

일본 정황을 관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종종 민족주의적인 주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가장 아름다운'은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에 대한 선전영화적인 느낌이 있고, 속 스가타

산시로에서는 명백한 반미감정과 미국 권투에 대한 일본 유도의 우수성이 묘사되어 있다.

 

 

 

 

 

반면에 그의 초기 전쟁영화인 우리 청춘 후회없다는 체포된 우익분자의 아내에 관한

영화로 일본제국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을 찍은 후 주연 야구치

요코(矢口陽子)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손녀는 배우로 유명한 구로사와 유우(黒澤優)이다.)

러시아 문학과 존 포드의 영화에 영향을 받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맥베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 등을 개작하여 다양한 문예영화를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칠인의 사무라이, 숨은 요새의 세 악인 등의 순수 오락영화 시대극도 있고,

이키루, 천국과 지옥 등의 휴먼드라마 현대극 등도 있다. 주정뱅이 천사(1948년)부터 붉은 수염

(1965년)까지 주연으로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郎)를 자주 기용하였다.

 

 

 

 

1960년에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려 독립하게 되지만 이후 계속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 시기에 사무라이 오락물이 많이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영화의 침체기에 빠져든 60년대에

그는 오히려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기획들을 내놓았고 영화사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다. 게다가

그 타협을 모르는 엄격한 제작태도때문에, 영화제작이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붉은 수염 제작 이후

도호와 관계가 악화되어 구로사와는 미국에서 폭주기관차의 제작을 준비하나 제작방침이 바뀐

미국측과의 심각한 대립이 발생하여 영화는 제작되지 못했다.(이후 이것은 안드레이

콘차롭스키 (Andrei Konchalovsky) 에 의해 구로사와의 각본을 원안으로 삼아 영화화된다.)

 

 

 

 

1968년에 미일 합작으로 도라 도라 도라의 일본측 감독으로 일하게 되지만, 미국측

제작사였던 20세기폭스나 그 일본인 브로커 등과 촬영 시작부터 스케줄이나 예산 등을 둘러싸고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 감독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살 미수사건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구로사와의 대신으로는 마쓰다 도시로(舛田利雄)、후쿠사쿠 킨지(深作欣二) 등이 공동 감독이 되었다.

(크레딧에는 공동감독으로 나왔지만 사실은 특수촬영이나 전투기 콕핏신 등에서의 조감독

역할을 했다)덧붙여 구로사와 본인의 의향에 따라 크레딧에는 이름이 없지만 각본은

구로사와가 쓴 것이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 이후 영화제작에서 멀어져있다가, 소련 영화계의 전면지원으로 데루스 우잘라를,

조지 루커스, 프란시스 코폴라를 프로듀서로 카게무샤를, 프랑스와의 합작으로 란을, 워너브라더스

제작(크레딧에는 스필버그 제공으로 나온다)으로 꿈을 만드는 등 해외 자본으로 영화를 계속

만들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팔월의 광시곡, 마다다요를 감독하였으나 차기작으로 예정된 비 그치다의

각본을 쓰던 중 교토의 여관에서 넘어져 골절을 당하는 바람에 영화 제작은 불가능해졌다.

1998년 9월 6일에 뇌졸중으로 사망하였고, 같은해 10월 1일에 일본 국민영예상을 받았다.

 

  

 

 

수상


1950년, 라쇼몽 :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블루리본상 (영화)
1954년, 칠인의 사무라이 :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
1958년, 숨은 요새의 세 악인 : 베를린 국제 영화제 은곰상 (감독상)
1975년, 데루스 우잘라 :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1980년, 카게무샤 : 칸영화제 그랑프리, 영국 아카데미상 감독상
1982년, 베니스영화제 평생공로상
1984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85년, 란 (영화) : 전미 비평가 협회상 최고 영화상, 영국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1985년, 문화훈장
1990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1995년, 국민영예상

 

 

 

주요작품

 

1943년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郎)

1944년 가장 아름답게(一番美しく)

1945년 속 스가타 산시로(続姿三四郎)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내들(虎の尾を踏む男達)

1946년 내 청춘에 후회 없다(わが青春に悔なし)

1947년 멋진 일요일(素晴らしき日曜日)

1948년 주정뱅이 천사(酔いどれ天使)

1949년 조용한 결투(静かなる決闘)

1949년 들개(野良犬)

1950년 추문(醜聞)

1950년 라쇼몽(羅生門)
1951년 백치(白痴)

1952년 이키루(生きる)

1954년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5년 생존의 기록(生きものの記録)

1957년 거미집의 성(蜘蛛巣城)

1957년 밑바닥(どん底)

1958년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隠し砦の三悪人)

1960년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悪い奴ほどよく眠る)

1961년 요짐보(用心棒)

1962년 쓰바키 산주로(椿三十郎)

1963년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

1965년 붉은 수염(赤ひげ)

1970년 도데스카덴(どですかでん)
1975년 데루스 우잘라(デルス・ウザーラ)

1980년 카게무샤(影武者)

1985년 란(乱)

1990년 꿈

1991년 팔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

1993년 마다다요(まあだだ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