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소에 심취해 한국인이 되어 살다간 원로 국악인 해의만(海義滿) 씨
원로 국악인 '해의만(海義滿)'씨가 지난 3월1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한국전쟁 당시 어둠속에서 들려오던 태평소 소리에 심취해 태평양 건너 동방의
이 작은 나라에까지 찾아와 귀화해 한평생을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전통 국악의 발전과
보급에 힘쓰다 간 이 독특한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진작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얼마전 타계한
원로 국악인 해의만 씨의 이야기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할까 한다.
'국악(國樂)'이란 요즘 세대뿐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에 살고있는 우리의
전통음악임에도 한참을 외면 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계화 열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워낙에 거의 대부분의 대중매체들이 우리의 것을 등한시 하며 돈 되는,
이른바 잘 나가는 음악들만을 선호하다 보니 어쩌면 어릴적부터 아이들이
서양음악에 쉽게 빠져들게 되는 일이 전혀 이상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어린 세대가 '요즘의 주류 음악들'에 쉽고 빠르게 동화되는 만큼,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것에 대한 소중함과 의미를 제대로 알고 난 뒤에 그리한다면
이 또한 전혀 문제될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교육 현실 자체가 그렇게 밖에
안되다 보니 어느새 등한시 하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심지어 어디가서 국악을
좋아한다라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손가락질 받기 쉬운게 현실 아니던가.
한국 사람이 한국 전통음악 좋아한다는 자체가 이 정도 상황까지 와있다.
요즘 광고에 잘 나오는 국악신동 '송소희'가 그래서 더 이뻐보이는 이유도
다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누구나 못해서 안달이 난 각종 오디션 프로에서 기교는
있을지언정 그들이 그렇게 혼신을 다해 부르는 노래와 제스쳐들이 나에게는 일말의 감흥이
전혀 와닿질 않는 이유 역시 머릿 속 생각이 이처럼 노인네 사고여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입바른 소리는 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얼마전 타계한 푸른 눈의 원로 국악인이었던
해의만 씨가 우리의 전통음악 '국악'의 세계화에 한평생을 이바지하던 중에 노환으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순간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자국민들(특히 젊은이들)도 국악을 오히려 창피해 하며 누구도 쉽게 이를 연구하거나
배워보려 하지도 않는 판에 푸른 눈의 이방인이 한국인을 대신해 국악을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했고 평생을 국악사랑과 연구발전에 이바지하며 살다 갔다는
이야기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타계한 원로 국악인 해의만 씨의 본명은 미국명으로 앨런 헤이먼
(Alen Heyman)으로 뉴욕 태생의 이른바 '뉴요커'였다. 그런 해의만 씨가
한국을 알게된건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1953년 위생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들었던 태평소 소리(아마도 북한군 진영에서 들려오던)에 감명을 받았던게
한국과의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4년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해의만 씨는 한국 유학생과 교류하며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으며, 급기야 1960년 그토록 오고싶던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원래 진작
오고 싶었으나 당시만 해도 민간인 신분으로 이 낯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
입국허가가 쉽게 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안된 분단국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다시 오게된 해의만 씨는 한국국악예술학교에 들어가
국악을 배우는 동시에 전통 음악과 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한국삼천리가무단'이 1964년 미국 27개 대학과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73년 국립국악원 연주단과 함께 이란, 프랑스, 서독 등에서
공연과 함께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건 1995년. 미국식 이름
'앨런 헤이먼'에서 해의만(海義滿)으로 바꾼 것인데 서울 해씨의 시조라고 한다.
'해의만'이란 이름을 쓰게 된건 1960년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오던 길에 만난
선교사를 통해 한국식 이름으로 바다 '해(海)'자에 '옳은 일로 가득
차라'는 의미에서 '의만(義滿)'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 2008년 캐나다 퀘백에서 있었던 세계군악대회에서 '태평소'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어쨌든 해의만 씨는 그렇게 팔자 없었을 지도 모를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역 땅과 인연을 맺었다. 총성이 오가는 전쟁통에 우연히 들었던 태평소 소리가
그의 영혼을 뒤흔들었던게 분명하다. 훗날 모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국의 전통음악인 국악이 왜 좋은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음악은 아주 즉흥적이면서도 기쁨과 슬픔 등 인생의 혼이 담겨 있어요.
서양음악은 4분의3박자인 경우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똑같이 반복되지만, 한국의
민속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반복 없이 진행됩니다. 넓은
사상이 있어요. 각 지역의 서민들의 삶이 담겨 있지요."라고 말이다.
해의만 씨는 그렇게 한국인들도 구닥다리라며 외면하던 전통음악에 대해
수십 년간 국악 자료 수집에 몰두하며 공을 들이는 삶을 살았다. 2010년 '서애악부',
'정축진찬의궤', '설중회춘곡' 등의 악서와 고서, 1960년대 국악 연주 녹음 자료 등
희귀 자료 60점을 국립국악원에 기증하기도 했으며, '삼천리 나라의 무용'(1964),
'한국판소리해설'(1972) 등 저서 5권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국악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국제문화협회 문화상(1982),
한국 유네스코위원회 문화상(1991), 국무총리 표창(1995), 은관문화훈장(2011)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옥자 여사와 아들 성광(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
선주(개인사업), 딸 람(캐나다 요크대 교수)씨가 있다.
이제 故人이 된 해의만씨에게 한국인들도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
한 국악을 사랑하고 아끼고 발전 및 전파하는데 한 평생을 바친데 대해
국악계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깊이 머리숙여 감사한다.
해의만
국악학자
출생:1931년(미국)
사망:2014년 3월 1일
수상:2011년 은관문화훈장
1995년 국무총리 표창
1991년 한국유네스코위원회 문화상
1982년 한국국제문화협회 문화상
[참고자료]-[김문이 만난사람] ‘푸른 눈’ 원로 국악학자 해의만의 국악사랑 50년(20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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