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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베컴 은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변치않던 축구선수로서의 위엄

베컴 은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변치않던 축구선수로서의 위엄

 

어제 외신에서는 영국의 추구스타 데이비드 베컴(David Beckham)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고 보도했다. 베컴의 친정, 멘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이 얼마전 은퇴를 발표한 뒤로 나온 또다른 은퇴소식이라 축구팬들로서는

유독 아쉬움이 클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잉글랜드 국가대표로서 뿐만 아니라

프리미어리그에서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스타 중에 스타로 화려한 축구인생을

이제 막 마무리할 때가 온 듯 하다. 하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베컴의 은퇴 소식이

너무도 아쉬울게 뻔하다. 과거 스파이걸스의 멤버로 활약했던 빅토리아 베컴의

남편으로도 주목받던 그의 화려했던 축구 인생을 되돌아 본다.
 

 

 

 

베컴은 은퇴를 공식적으로 밝히는 자리에서 "지금이 선수 생활을 끝낼

적당한 시기"라며 "마지막 기회를 준 파리 생제르맹 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또 덧붙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우승까지 차지하고 국가대표를 거쳐 세계적인

명문팀에서 뛴다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 꿈이었다"며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것은 대표팀 주장을 했다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베컴은 이번 시즌 프랑스 프로축구 파리 생제르맹으로 옮긴 뒤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선수 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1993년 잉글랜드 프로축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베컴은 2003년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2007년 로스앤젤레스 갤럭시(미국)를 거쳤으며 2009년부터 2년간

이탈리아 프로축구 A.C 밀란에서도 활약했다.

 

 

 


 

데이비드 베컴

(David Beckham)
축구선수
출생:1975년 5월 2일
신체:183cm, 76kg
소속팀:파리 생제르맹 FC (MF (미드필더))
가족:배우자 빅토리아 베컴,

아들 브루클린 베컴, 로미오 베컴, 크루즈 베컴, 딸 하퍼 세븐 베컴
데뷔:199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입단
수상:2012년 ESPY 어워드 MLS선수상

 

 

 

 

베컴은 개인 통산 718경기에서 129골을 터뜨렸다.

또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115경기에 출전해 17골을 기록했다. A매치 115경기

출전은 잉글랜드 필드 플레이어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베컴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배우 뺨치는 외모와 스타성을 겸비, 축구선수를 넘어 대중문화적

신드롬을 일으킨 '스포테이너'로 평가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이처럼 뛰어난 외모와 스타성 때문에 축구선수로서의 업적이 저평가

받았다는 의견도 있어왔던게 사실이다. 베컴은 1993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알렉스 퍼거슨 감독

애제자로 꼽히며 라이언 긱스, 게리 네빌, 폴 스콜스 등과 함께 맨유 전성기를 이끈

소위 '퍼기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돋보인 스타였다.

 

 

 

 

1999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사상 최초의 트레블(자국 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면도날같이 정확한 프리킥과 '택배' 크로스는

베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원제:Bend It Like Beckham,2002)

처럼 그의 이름과 슈팅능력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영국 총리로 등장한 휴 그랜트 대사를 통해 영국이 배출한 위인으로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해리포터와 함께 '데이비드 베컴의 오른발'이 꼽히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의 베컴이 영국 사회에서 누리는 인기와 지명도는 대단했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99년에는 당시 영국의 최고 인기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 멤버 빅토리아 아담스와 결혼, 세기의 스타커플 탄생을 알렸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세 차례나 월드컵에 출전해 남자들의 스포츠로 불리는

축구에서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여성 축구팬들까지 만들어냈다.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베컴은 스포츠를 넘어서 세계적인 패셔니스타로도 명성을 떨쳤다.

 

 

 

 

 

 

각종 세계적인 명품 패션 브랜드의 모델로 발탁되는가 하면, 부인과 직접 향수

브랜드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선보인 이른바 '닭벼슬 머리'는

세계적인 유행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베컴은 어디까지나

축구선수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잠깐의 대중적 인기에 취해 자기관리에

실패한 스포츠스타들과 베컴이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 [CF] David Beckham Galaxy Note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언제나 축구였고,

그런 열정과 철저한 자기관리를 바탕으로 베컴은 동시대의 어느 축구스타보다도

장수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베컴은 2003년 퍼거슨 감독과의 불화로 맨유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이후 이탈리아 AC밀란, 미국 프로축구 LA 갤럭시,

다시 프랑스 파리 생제르망 등 수많은 리그를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우승을 경험했다.

4개리그에 걸쳐 우승은 경험한 것은 영국 선수로서는 최초다.

 

 

 

 

보통 영국 출신 선수들이 자국무대를 벗어나지 않고, 해외무대에서는 자국만큼

인상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행보였다. 세월이 흘러 퍼거슨 감독과

화해하며 베컴은 때로 맨유를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맨유를 떠난 이후에도 베컴의

커리어는 손색없을 만큼 훌륭했다. 잉글랜드 대표팀 유니폼에 애착이 컸던 베컴은

정작 국제무대에서는 만족할만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잉글랜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3회의 월드컵에 출전했고, 그 중 두 번의 대회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뛰었다.

 

 

 

출전한 대회에서는 모두 골을 넣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번번이 8강 징크스에

눈물을 흘렸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1998 프랑스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서는

신경전 끝에 상대 선수를 발로 밟았다가 퇴장당해 패배의 원흉이 되어 국민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 월드컵이 될 수 있었던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대회 직전 월드컵 출전의 꿈을 접어야했다.

 

 

 

 

베컴은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판타지스타였고, 축구선수로서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린 축복받은 스타였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커리어는 단지 뛰어난

외모나 타고난 조건이 아닌, 화려함 뒤에 감춰진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의 산물이었다.

베컴의 은퇴를 정작 접하자니 매우 큰 허전함이 벌써부터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