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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8.15 15:44

설국열차 원작자 뱅자맹 르그랑(Benjamin Legrand), 장마르크 로셰트(Jean Marc Rochette) 내한






설국열차 원작자 뱅자맹 르그랑(Benjamin Legrand),

장마르크 로셰트(Jean Marc Rochette) 내한

 

'설국열차'는 박찬호 감독이 제작하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이지만, 원작은 프랑스 만화다.

바로 그 '설국열차' 원작자인  뱅자맹 르그랑(Benjamin Legrand)과 장마르크 로셰트(Jean Marc Rochette)가

내한해 이들의 원작작품인 '설국열차'가 영화화 된데 대한 소감과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털어놓았다.

영화 '설국열차'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프랑스 만화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이제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워낙 영화가 단숨에 7백만을 넘어 천만고지를 향해 내달릴 정도로 파죽지세의 흥행기록을 새로이 쓰고

있다보니, 매니아 수준으로 이 영화에 대한 기본 정보는 벌써 다 꿰찼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설국열차'의 원작자가 두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알쏭달쏭해 하는

분들도 많았을 텐데, 우리식으로 하면 '글, 그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도 언제부터인가

만화를 보다보면 글을 쓴 사람과 원화를 그린 사람이 나뉘어 소개되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즉, 만화에서 '글'이란 '시나리오'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때문에 '설국열차'의 원자자 중에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뱅자맹 르그랑(Benjamin Legrand)이고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장마르크 로셰트(Jean Marc Rochette)가

되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내한 후 15일 제16회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참석한 자리에서 영화화 된데 대한

소견과 봉준호 감독의 표현대로 이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비화 등을 소개했다.

 

 

 

 

 

우선 21세기에 자신들의 원작작품이 동명 그대로 '설국열차' 영화로 탄생하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그린 장마르크 로셰트는 과거 프랑스 감독들에게 영화화 하자는 러브콜을 세 번 정도 받은 적이 있는데

그중 두 번은 가벼운 제안이었고, 한 번은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또 우리가 몰랐던 사실 가운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설국열차'의 1권 시나리오가 원래 작가 '자크 로브'에 의해 쓰였다는 것인데 그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 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서라도 봉준호 감독에 의해 자신들의 작품이 영화화 된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과거 80년대에 이 작품이 영화화되었다면 지금처럼 기술적으로 원작에서와 같이

효과적인 모습을 구현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이유에서이다.

 

 

 

 

 

 

원작 '설국열차'는 1970년대부터 자크 로브와 알렉시스의 구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70년대에 이런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발상 자체가 대단하다. 이래서 봉준호 감독이 말끝마다

'위대한 작품'이라고 말했던가. 어쨌든 이미 1970년대 처음 구상을 했던 이 작품이 1977년 알렉시스가 죽고

이후 장마르크 로셰트가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어 1984년 제 1권이 출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크 로브 역시 1990년 세상을 떠났다. 결국 뱅자맹 르그랑과 장마르크 로셰트가 나머지 시리즈에

대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함으로써 지금의 원작품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설국열차' 원작자가 이처럼 한 사람의 손을 거친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와 만화가가

바뀌어가면서까지 '프로젝트' 차원의 만화가 완성될 수 있는 건 역시도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란

나라가 만화 산업에 있어 얼마나 제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만화사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대단한지

짐작해보게 해준다. 이미 80년대에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고 훌륭한 작가들이 많았다라는 것을

우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만화 '설국열차'가 영화화되고 또 원작자들이 이렇게 한국을

찾게되기까지 하니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8.02 11:48

패혈증으로 사망한 전두환 닮은 배우 박용식






패혈증으로 사망한 전두환 닮은 배우 박용식

 

배우 박용식 씨는 과거 '제5공화국'등에서 전두환을 가장 닮은 배우로 유명했다.

그렇게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닮은 외모로 유명세를 탔던 배우 박용식씨가 2일 오전 7시께 바이러스성

패혈증으로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박용식 씨 외에도 패혈증으로 사망한 유명인으로는

지난해 12월 사망한 황수관 박사도 있다. 평소 건강한 웃음을 선사하던 건강박사가 그렇게 어처구니

없게 우리 곁을 떠났을 때도 망연자실해 했는데, 이번에도 패혈증으로 인해 배우 박용식씨가

그렇게 돌연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 고인이 된 故 박용식 씨는 지난 1일 경희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하루 만에

패혈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최근 영화 촬영 차 캄보디아에 20일 정도 머물면서 바이러스성

패혈증 증세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2~3일 전쯤 건강에 이상을 느껴 6월초에 귀국하자마자 1주일

정도 입원하다 퇴원했지만 얼마전 다시 또 입원한 것인데 결국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박용식 씨가 패혈증으로 사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시선' 이란

작품이었다. 2남 1녀 중 맏아들 박세준씨는 투자배급사에서 일하는 영화인으로 알려졌는데 바로 아들이

준비한 영화에 출연했다가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려 더더욱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故 박용식 씨는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방송출연을 하지 못했던

암울한 시절이 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훗날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가볍게나마 미안한 마음을

전했던 것으로 아는데, 어쨌든 그렇게 살아생전 내내 '박용식=전두환'으로 통할 정도로

가장 닮은 배우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있다. 배우 박용씨식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도 안타까워 하는 마음과 더불어 故人의 명복을 비는 분위기이다. 패혈증으로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한 배우 박용식 씨는 1967년 TBC 공채탤런트 4기로 데뷔한 이후 드라마 MBC

'제3공화국' '제4공화국' , 영화 '투사부일체' 등을 통해 명품 조연으로 인정받았다.

 

 

 

 

박용식

탤런트, 영화배우

출생:1946년 12월 26일 

사망:2013년 8월 2일

학력: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데뷔:1967년 TBC 공채탤런트 4기

수상:2003년 제40회 저축의 날 대통령표창

경력:2002.04 세계덴트칼라시스템 회장

 

 

 

 

 

 

 

 

 

패혈증
sepsis , 敗血症

 

세균이 혈액 속에 들어가 번식하며 생산된 독소에 의해 중독 증세를 나타내거나

전신에 감염증을 나타내는 상태를 말한다. 사망률이 높으며 대부분 합병증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면역력 약화로 백혈구가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백혈구는 평소 우리 몸 속에

침투한 세균을 없애주는 역할을 하는데, 몸이 쇠약해져 면역력이 약화되면 백혈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부패한 혈액이 온 몸을 돌아다니며 중요 장기들을 망가뜨리게 된다.

심내막염을 일으키면 심장음을 들을 수 있다. 치료는 조속히 강력한 항생물질요법을 실시하는데,

원인균이 검출되면 그 균에 대하여 가장 효과가 있는 항생물질을 선택하여 사용한다. 원인병소가 있는 것은

그 치료도 함께 실시한다. 예방은 아무리 간단한 화농이라도 항생물질이나 소독약으로 속히 치료하고,

감염증에 걸렸을 때 몸이 떨리고 고열이 나면 즉시 의사의 지시를 받도록 한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7.31 14:59

성재기 남성연대대표의 예고 투신 자살을 보면서...






성재기 남성연대대표의 예고 투신 자살을 보면서...

 

성재기 남성연대대표가 한강에 투신 하겠다고 예고까지 했을 때만 해도

설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 했었다. 반신반의 한 것도 아니고, 아예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26일 오후에 느닷없이

성재기 대표가 마포대교에서 투신하는 장면까지 담긴 사진이 올라왔을 때 무척

놀랐었다. 설마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성재기 대표의 예고 투신 이후 이런 일이 실제 일어나고서도

분명 헤엄쳐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리고 또 그 다음날이

돼어서도 수색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말만 나올 뿐 시신이 발견돼지 않아 차라리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름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기어이

성재기 대표는 예고 투신한 날로부터 나흘째 되는 날인 29일 오후 서울 서강대교 남단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시신발견 당시 이미 부패정도가 심한 상태였다고 한다.

 

 

 

 

 

분명 성재기 대표는 퍼포먼스 목적이었던 듯 하다. 투신 전 마지막

문자에도 '반드시 살아남겠다'라고 글을 남겼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도 사고조사 후

성재기 대표가 자살 목적으로 투신한 것이 아니라, 퍼포먼스를 벌이다 사고사

한 것으로 잠정결론 내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를 지지하거나 별 다른 관심이 없었던게 사실이다.

일전에 강용석과 썰전 방송 이후 욕설을 하는 바람에 인기검색어로 떠오르고 했을 때

그나마 성재기 대표가 어떤 일들을 하는 사람인지 우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성재기 대표 투신 이후 배우 하석진이 SNS에 추모글을 남겼다가 네티즌들로부터

일베회원 아니냐는 오해를 사며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참 희안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씁쓸한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성재기 대표는 그동안 여가부(여성가족부)를 상대로 1인시위를 하는 등

남성권익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여기에 일베회원들

일부가 동조하며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적 이슈나 이념 등이 얽히면서 그를 두고

이런전런 말들이 많았던 듯 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가만보면 자기와 똑같으면 웃고

자기와 다르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적대시하는데 매우 신기할 정도로 집단 군중심리가

쉽게 동요한다. 미디어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조그만 나라 치고 분열이 매우 심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젠 故人이 되어버린 성재기 대표도 민주주의 국가에 살면서 나름대로

한 목소리를 냈던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양한 목소리의 수용이

없고, 언제나 한 목소리만을 강요하고 중요시하는 심각성을 안고 있다는데 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분명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이 나라, 이 사회는 얼마만큼

그런 것들이 보장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모쪼록 성재기 대표가 예고 투신 끝에 누구도

원치 않았을 사망을 맞이한데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아니지만, 삼가 故人의 명복을 빌어본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7.24 14:56

구글 회장 래리 페이지(Larry Page)의 성공이 부러운 대한민국, 아직도 IT강국이라고 믿나?






구글 회장 래리 페이지(Larry Page)의 성공이 부러운

대한민국, 아직도 IT강국이라고 믿나?

 

앞서 네이버 규제와 관련한 글을 포스팅 하면서 '구글(Google)'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언제고 기회가 되면 모든 면에서 국내 최악의 포털 네이버와 비교 돼는 글로벌 기업

'구글'과 창업자이자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래리 페이지, 그리고 '페이지랭크'란 기술을 개발했던

그의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들이 창업을

준비하던 비슷한 시기에 전 세계는 인터넷 열풍과 더불어 IT붐이 폭발적으로 일어 났었고

대한민국도 한 때는 잠깐이지만 세계가 부러워하는 IT강국일 때가 있었다.

 

  

 

 

물론 지리적 특성이나 국민적 속성으로 IMF를 막 극복하고 일어나 침체된 경기에

활력을 가져올 무언가를 모색해야 했던 우리나라의 경우는 좁은 땅덩어리 덕에 그런 IT강국

으로의 기반을 닦을 수 있는 인프라 구성이 비교적 다른 국가에 비해 쉬운 편이었고

또 당시 국민의정부 시절 새로운 미래 성장동력을 필요로 하는 염원에 의해 수 많은 벤처와

IT산업을 육성 및 장려하고자 하는 관심과 열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구글'은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자신들이 개발한

백럽(BackRub)기반 검색엔진을 들고 여러기업의 문을 두드렸으나 번번히 거절당하자, 자신들이

직접 회사를 차리자며 여자친구의 자동차 차고에 사무실을 내고 초라하게 창업했지만, 오늘날 전 세계

데이터 센터에 100만 대가 넘는 서버를 갖추고 명실상부 최고의 IT 기업으로 성장했다. 흔히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해야 할 듯 하다.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창의적인 노력에 대한 댓가가 확실한 이런 국가 시스템이 결과적으로

이들을 배양해 낸 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진정한 IT강국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요즘 흔히 역사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다고 푸념하 듯 IT시계가 무슨

귀뚜라미 보일러도 아니고 정말 거꾸로 돌아가 버렸다. MB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정통부를 폐지하더니

그 자리에 새로운 국가성장동력으로 '삽자루'를 꽂아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인터넷 하면 '네이버'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정말 그랬다라면 소통부재의 일방적 공산주의적 발상이다.

때문에 결국엔 네이버 규제까지 온 것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말이 규제이지 솔직히 안믿는다.

IT강국은 무슨 얼어죽을 소린지 모를 일이다. 참신함과 창조적 가치라도 돋보이면 좋으련만,

정확히 말해 네이버를 주축으로 기형화됀 낚시 공화국으로 전락했다. 오죽하면

야후(YAHOO)가 두손 두발 다 들고는 짐 싸서 한국을 떠나버렸을까. ㅋㅋㅋ

 

 

 

 

'구글'이 세계 무대에 뛰어들어 최고의 기업으로 고속 성장하는 동안 네이버도

몇몇 해외진출의 노력은 했었다. 하지만 몇번 고배를 마시는가 싶더니 이내 국내에 엉덩이 깔고

주저 앉아 버렸다. 현실에 일찌감치 안주한 것이다. 그리고는 수많은 벤처들의 기회를 빼앗아

가면서까지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했다. 결국 이번에 정치권의 네이버 규제를 통해

네이버 공룡이 최후를 맞을지는 미지수이다. 십중팔구 엄포 쌩쇼로 끝날 것이고 또 그렇게 

넘어가겠지만, 결국에는 언젠가 싸잡아서 망할 날이 올 것이라고 본다.

 

 

 

 

 

 

 

 

  

     

 

 

 

구글(Google) 창업자 래리 페이지(Larry Page)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

 

래리 페이지(Larry Page)의 스탠포드대학교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이 가담하면서 두사람이 공동으로 개발하였다.

페이지는 미시간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부모님은 미시간대학교 컴퓨터과학부 교수였다.

세르게이는 6살 때 미국으로 이민온 러시아인이었으며 그의 부친은 메릴랜드대학교

수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미항공우주국(NASA)에 과학자로 근무했다.

 

 

 


이런 부모의 영향으로 세르게이는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두사람은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인터넷 검색분야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백럽(BackRub)이라고 불렀는데 웹상에서 링크된 정보를 분석하여

자신의 웹페이지에 누가 접근하여 링크되어 있는지 알수 있도록 해준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링크된 페이지에 링크 숫자를 분석하여 랭킹(ranking)을 나타내도록 했다. 두사람은백럽의

결과에 따라 그것으로 인해 인기가 높은 사이트와 낮은 사이트를 구분하여 서열을 매겼고

이것을 인터넷 검색 결과에 인기가 높은 순서대로 적용하였다.

 

 

 


이런 검색 결과는 당시 인기 높았던 알타비스타(Altavista)나 야후(Yahoo)의

검색보다 뛰어난 검색 결과값을 얻게 되었다. 알타비스나와야후는 텍스트 형태소 검색 결과

값만을 고려하였고 다른 신호는 검색결과를 만드는 신호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페이지랭크(PageRank)라고 명명하였으며 구글(Google)이라는 검색엔진을

개발하는 바탕이 되었다. 구글은 'googol'에서 따온 말로, 10의 100승을 의미하는데 이는

수많은 웹페이즈를 검색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대규모 하이퍼텍스트 웹 검색엔진의 해부(Anatomy of a large-Scale Hypertextual

Web Search Engine)'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그들의 검색기술을 팔기위해 여러 업체에

제안하였지만 모두 거절되었다. 얼마후 자신들이 직접 창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지도교수의 소개로

앤디벡톨샤임(Andy Bechtolsheim:썬마이크로시스템 창립자)를 만나 10만불을 투자받게 되었다.

1998년 9월 7일 마침내 구글을 설립하였고 세르게이브린 여자친구의 차고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이후 구글은 점차 유명세를 타게 되었으며 1999년 2500만 달러 투자를

유치하면서 실리콘벨리에서주목받게 되었다.

 

 

 


한동안 수익모델이 없어 구글의 성공여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으나

2001년 애드워즈(Adwords)라는 검색광고를 수익모델로 도입하자 구글은 인터넷 광고시장을

빠르게 점유해 나갔다. 2001년 래리 페이지를 대신할 CEO로 선마이크로시스템과 노벨에서

최고경영자로 일한 경력이 있는 에릭슈미트를구글의 CEO로 영입하였다. 당시 인터넷 기업은

극심한 침체기였지만에릭슈미트 영입 이후 구글은에드워즈가 점차 광고효과를 발휘하며 계속 흑자를

이어갔다.구글은 사진 공유 서비스인 피카사(Picasa), 위성지도를 서비스하는 키홀(Keyhole) 등의

업체를 인수하였고 구글이미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구글은 약 30억개의 인덱스를 보유하면서 전세계 약 40개의 언어로 검색서비스를 제공했다.
구글은 직원들에게 업계 최고의 대우와 복지를 제공했으며 실리콘벨리의 대부분 IT기업들이 심한

불황을 겪을 때에도 구글은 계속 성장했다. 2003년 애드센스 광고서비스를 시작하였고 애드워즈처럼

검색광고로 성공하였다. 하지만 구글은 이런한 성공의 이면에는 많은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검색 신뢰도를 내세운 기업이었지만 검색 결과를 두고 구글댄스(Google Dance)라는 비판과 함께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또한 개인정보가 쉽게 노출되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마침내 2004년 8월 19일 나스닥에 상장하였고 2개월이 지나자 주식값은 두배로 올랐다.
2006년 세계최대 동영상 사이트인 유투브를 인수하였고 2007년 미디어랩인 더블클릭을 인수하면서

종합미디어 기업으로 변모하였다. 2011년 8월 15일 모토로라(Motorola)의 휴대전화 사업부를 인수하면서

휴대폰 하드웨어 개발력을 함께 갖추게 되었고 모바일 시장에도 구글의 사업 영역이 확장되었다.

 

 

 

 

구글의 이러한 성공에 대한 비판론도 제기되었다. 구글이 인터넷 검색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와 거만하고 오만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구글의 성장은 계속되었다. 2011년 에릭 슈미트가 구글 CEO에서 물러나고

래리 페이지가 10년만에 다시 CEO로 복귀하였다. 현재 구글은 전 세계 데이터 센터에 100만 대가 넘는

서버를 갖추고 있으며, 매일 10억 건 이상의 검색이 구글을 통해 이루어진다.구글 도메인은

2010년 현재 150여 개에 달하는데, 도메인을 처음 등록한 것은 1997년 5월이었다.
현재의 본사는 캘리포니아 마운틴 뷰에 있는데, 2006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래리 페이지

(Larry Page, Lawrence E. Page)
기업인
출생:1973년 3월 26일(미국)
소속:구글 (CEO, 최고경영자)
학력: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 컴퓨터공학 석사
수상:2002년 세계경제포럼 내일을 위한 글로벌 리더
경력:2011.01~ 구글 CEO, 최고경영자
구글 제품부문 사장
검색엔진 구글 공동설립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7.23 18:20

류현진 8승 달성, 6이닝 채우지 못하고 내려와 아쉬운 8승






류현진 8승 달성, 6이닝 채우지 못하고 내려와 아쉬운 8승

 

LA다저스의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후반기 첫 등판에서

시즌 8승을 달성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아침부터 류현진의 8승 달성이 가능할지 많은

한국팬들의 기대가 컸었는데 결국 시즌 8승 달성해 성공했다. 하지만 류현진은 8승 달성에

성공하긴 했어도 이날 경기에서 6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9피안타 2볼넷 4실점을

기록해 큰 아쉬움을 남겼다. 경기는 승리했지만 내용으로 보면 류현진으로서도 몇가지

아쉬운점을 남겨 본인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류현진은 한국시각으로 23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로저스센터에서 열린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원정경기에 시즌 19번째로 선발 등판했다. 그러나 12일간의 긴 휴식이

오히려 악재로 작용한 듯 하다. 류현진의 직구 구위와 스피드는 나쁘지 않았지만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등 주력 변화구의 위력이 이전보다 많이 떨어져 보였고 컷패스트볼과 스플리터 등

순간 구속 차이를 보이는 변화구를 조합하지 않는 류현진으로선 병살타와 플라이아웃을

유도하며 근근히 이닝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다소 부진했던 류현진이 8승을 챙길 수 있었던 데엔 그래도 14점을 뽑아낸

LA다저스 타선의 도움이 컸다. 물론 그동안 확실한 타선지원을 받지 못했던 류현진으로선

위안을 삼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운드에서 내려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은 이번 경기에 스스로 만족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5.1이닝 9피안타 2볼넷 3탈삼진으로 4실점 했지만, LA다저스는 타선이

폭발하며 무려 14점을 뽑아내 14-5로 승리했고, 류현진은 시즌 8승을 챙겼다.

 

 

 

 

류현진 8승 달성의 위업은 특히 1회에만 25개를 던지는 등 류현진은 투구수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류현진은 4회까지 매회 20개 이상 공을 던지며 좀처럼 컨디션 회복을

하지 못했었다. 4회말까지 무려 85개의 공을 던지며 제구에 어려움을 겪었던 류현진은 5회

단 10개의 공으로 세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 퀄리티스타트의 가능성을 남겨뒀다.

하지만 6회 류현진은 1사 1,2루 실점 위기에서 102개의 투구수를 기록한 채 마운드를 내려왔다.

더 아쉬운 점은 샌프란시스코의 헌터 펜스와 필라델피아의 체이스 어틀리 등

기존의 천적 만큼 류현진에게 강한 천적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투구수 관리와 제구에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류현진은 결정적인 실점 위기에서 병살타를 유도하고 삼진을 잡아내며

특유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류현진의 8승 달성이 성공하면서 방어율은 3.09에서 3.25로 올라갔다.

한편, 류현진은 오는 28일 추신수가 뛰고 있는 신시내티 레즈와의 홈경기에 등판해

한국인 메이저리그 투타 대결을 펼칠 예정이다.

 

 


  • Favicon of https://oldhotelier.tistory.com 늙은 호텔리어 몽돌 2013.07.24 12:4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담주 기대되네요.
    옛날 박찬호 경기랑은 또 다른 느낌..
    그땐 얼마나 가슴 졸이던지~ 처음이고 그리고 박찬호의 스타일도 그렇고.
    류현진에겐 그런 불안함은 없지만 그래도 왠지 박찬호 만큼은 재밌지 않더군요.ㅎ

    • Favicon of https://speciallotto.tistory.com 사색하는남자 스페샬로또 2013.07.24 13:23 신고 수정/삭제

      네. 그쵸. 박찬호는 생김새부터 드라마틱했습니다.
      이단 옆차기 같은 이벤트도 있었고 말이지요. ㅎㅎㅎ
      태권 한국의 기상을 보여주었던 스릴러 였습니다.
      그에 반해 류현진은 생긴만큼이나 묵직하죠.
      덜 드라마틱 합니다. ㅋㅋㅋ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7.23 17:04

김종학 PD 사망, TOP스타들과 함께 한 대한민국 드라마계의 대부 사망






김종학 PD 사망, TOP스타들과 함께 한 대한민국 드라마계의 대부 사망

 

김종학PD가 사망 소식을 듣고 한동안 망연자실한 기분이 들었다.

김종학 PD의 손길을 거쳐간 수많은 작품들은 대작으로 길이 남을 작품들이 많았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태왕사신기 등등 송지나 작가와 호흡을 맞추며 걸작으로 빚어낸

작품들이 많았었다. 최근 들어 김종학 PD는 깊은 침체기에 들어갔나 싶었는데

불현듯 이런 비보가 들려왔다. 삼가 故人의 명복을 빈다.

 

 

 

 

김종학PD는 7월23일 경기 분당의 한 고시텔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고

경기 분당경찰서가 밝혔다. 김종학 PD 사망 사실이 알려지며 애도의 물결이 줄을 잇고 있다.

대한민국 연예계에 드라마와 관련해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대부분

TOP스타들이 많다. 최재성, 최민수, 고현정, 이정재, 이병헌, 심은하, 신현준, 송혜교...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매우 많다. 그만큼 대한민국 드라마계의 대부로 확고한 이미지를

쌓아왔던 김종학 PD 였는데 최근 연출과 제작을 겸하면서 제작비와 관련한 송사에

종종 휘말리면서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김종학 PD는 그동안 작품을 꿰뚫는 연출력과 뛰어난 현장 장악력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카리스마 있는 연출가라는 평가를 받아 왔었다. 송지나 작가와는 1987년 MBC드라마

'퇴역전선'으로 처음 호흡을 맞춘 뒤 '우리읍내',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대망', '태왕사신기',

'신의'까지 모두 7편에서 같이 작업했다.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있을 때는 제작자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인순이는 예쁘다', 영화 '인샬라', '산부인과' 등에 참여했다.

 

 

 

 

MBC 사극의 대부 이병훈 PD도 김종학PD 사망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배우 최민수는 물론 고현정 등 유명 텔런트 및 배우들도 김종학PD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충격과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사망한 김종학PD 빈소는 7월 23일 오후 경기도 분당구

야탑동 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조문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시대의 아이콘 김종학PD는 1991년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1995년 SBS 드라마 '모래시계', 1998년 SBS 드라마 '백야 3.98', 1999년 SBS 드라마 '고스트',

2002년 SBS 드라마 '대망', 2007년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 2012년 SBS 드라마 '신의' 등 쟁쟁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드라마계 대부였다. 김종학 PD의 손을 거쳐간 작품들 속 배우들 대다수가 현재

손꼽히는 톱스타이기도 하다. '여명의 눈동자'에 출연했던 최재성, 채시라, 박상원도 그렇고

'모래시계'의 최민수, 고현정, 이정재 그리고 '백야 3.98'에는 이병헌, 심은하, 신현준, 진희경, 유준상,

송혜교가 출연했으며 '고스트'에는 장동건과 김민종이 '대망'에는 한재석, 장혁, 이요원, 손예진이

출연했다. 가장 최근의 드라마로는 '태왕사신기'에 배용준, 문소리, 이지아 등이 '신의'에는

이민호, 김희선, 유오선 등이 출연했다. 얼마만큼 큰 별이 진 것인지 김종학 PD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정말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종학
전 PD, 영화감독
출생:1951년 11월 5일
사망:2013년 7월
데뷔:1981년 MBC 드라마 '수사반장'
수상:2007년 MBC 연기대상 공로상
2006년 경희언론문화인상
2003년 PD연합회 대상 작품상
경력:2010.12 제2회 서울문화예술대상 심사위원
1995~2009 김종학프로덕션 대표이사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1977년 MBC에 입사했다.

범죄 추리극으로 유명했던 '수사반장'(1981년)이 첫 작품이다. 대표작으로 '여명의 눈동자'(MBC),

'모래시계'(SBS) 등이 있다. 1995년 MBC를 떠나 제작사 제이콤을 설립했다.

1999년 김종학프로덕션을 설립했지만, 2009년 떠났다. '태왕사신기' 이후 5년 만에 선보인

SBS 드라마 '신의'가 10%대 조반의 시청률에 그쳐 고심했다.
2013년 7월 2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한 고시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수상

 

한국방송대상 연출상 - 인간의 문 (1984)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 동토의 왕국 (1984), 여명의 눈동자 (1992)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 동토의 왕국 (1984), 여명의 눈동자 (1992), 모래시계 (1995)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 모래시계 (1995)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 대망 (2003)
경실련/시청자가 뽑은 올해의 드라마 - 대망 (2003)
PD연합회대상 작품상 - 대망 (2003)

 

 

 

 

1981년 《수사반장》 (MBC)
1983년 《광대가》 (MBC)
1983년 《다산 정약용》 (MBC)
1983년 《고산자 김정호》 (MBC)
1984년 《인간의 문》 (SBS)
1984년 《조선 총독부》 (MBC)
1984년 《동토의 왕국》 (MBC)
1984년 《일곱송이 장미》 (MBC)
1985년 《영웅시대》 (MBC)
1986년 《북으로 간 여배우》 (MBC)
1986년 《회천문》 (MBC)
1986년 《남한산성》 (MBC)
1988년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MBC)
1988년 《우리읍내》 (MBC)
1987년 《퇴역전선》(MBC) : 송지나 작가와 처음으로 같이 작업한 작품.
1988년 《인간시장》 (MBC)
1989년 《황제를 위하여》 (MBC)
1989년 《제 5열》 (MBC)
1992년 《여명의 눈동자》 (MBC)

1995년 《모래시계》 (SBS)

1998년 《백야 3.98》 (SBS)
2002년 《대망》 (SBS)
2007년 《태왕사신기》(MBC)
2012년 《신의》(SBS)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7.23 09:52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 VS 코리안 특급 박찬호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 VS 코리안 특급 박찬호

 

후반기 첫 등판에 나선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이 시즌 8승 달성을 위한 도전에 나섰다.
'코리안 몬스터'라 불리우는 류현진과 과거 '코리안 특급'으로 불리웠던 박찬호의 공통점은 일단

두 사람 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활약하고 LA 다저스에서 뛰었다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오늘 류현진의 경기중계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도 집중돼고 있고 해서 이 두 사람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지난해 11월 말 박찬호는 파란만장한 현역 야구선수 생활에 은퇴를

선언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뒤를 이어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이 저력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 23일 시즌 8승을 달성할 것인지의 여부에 큰 관심이 집중돼고 있다.

 

 

 

 

류현진은 23일 오전 8시(한국 시각) 캐나다 토론토 로저스센터에서 열린

2013시즌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해 2회까지 3피안타

무실점을 기록 중이다. 타선의 지원을 받아 4-0으로 앞선 2회엔 선두타자 마크 데로사에게 안타를

내주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으나 이후 흔들리지 않고 3명의 타자를 범타로 처리하는 안정감 있는

투구를 펼치며 일단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다. 류현진의 경기중계를 끝까지 지켜보아야 겠지만,

현재 분위기로 봐서는 류현진의 시즌 8승 달성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박찬호를 떠올리면 따라 붙는 수식어가 많다. 기복도 심했고 강등을 당하거나

부진과 호조를 반복하고 팀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IMF 당시 실의에 빠진 대한민국 국민의 희망이 되어 주었던 '코리안 특급'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경기 시작전 모자를 벗어 관중에게 깍듯이

인사하던 모습은 현지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한국민으로서 뿌듯한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었다. 잘 생기고 서양인 못지 않은 덩치에 LA다저스 유니폼이 썩 잘 어울렸던 당시 모습을

기억한다. 솔직히 몬스터 류현진에 비하면일단 뽀대 하나만큼은 정말 보기 좋았다.^^;

 

 

 

 

하지만 박찬호의 화려함도 잠시. 검색어에도 나오는 '박찬호 이단옆차기'사건은

큰 위기를 안겨주기도 했었다. 연일 지금의 류현진 처럼 국민적 관심사가 대거 집중되던 가운데

터진 이 사건이 각종 일간지 1면을 장식하고 전 세계적으로도 대서특필되었던 이단옆차기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었다. 이후 마냥 잘 나갈 것만 같았던 박찬호가 보일듯 보이지않게 심한

마음고생을 하던 것들과 이어진 깊은 슬럼프들도 어찌보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의 선수생활에

있어 그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정서가 매우 예민한 편이었다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제 박찬호는 은퇴를 했고 그야말로 몬스터 류현진이 그 뒤를 이어 나가고 있다.

박찬호 이후 김병현이나 최희섭, 추신수 등 많은 한국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지만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만이 코리안 특급 박찬호를 대신하고 있는 듯 하다.

 

 

 

 

류현진
야구선수
출생1987년 3월 25일(인천광역시)
신체188.9cm, 115.6kg
소속팀LA 다저스 (투수)
학력대전대학교 사회체육학
수상2010년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인천 출신으로 동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6년 신인 드래프트 2차 1순위(전체 2순위)

지명을 받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등번호는 15번이었으나 한화 이글스에서

15번을 달고 오랜 기간 활동했던 투수 구대성이 미국 메이저 리그 뉴욕 메츠에서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99번으로 변경되었다. 그 때 그는 별 생각 없이 99번으로 변경했으나

이후에는 소속 팀의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재현을 위해 99번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재현하지 못했다고 한다.

 

 

 

 

프로 야구 데뷔 첫 해인 2006년 다승, 평균 자책, 탈삼진 1위로 투수 3관왕에

오르며 신인상과 최우수 선수상을 동시에 석권했다. 신인이라고 하기엔 믿기 힘든 뛰어난

활약으로 '괴물'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데뷔 첫 해 한국시리즈에도 등판하였다.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2006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지만 아시안 게임에서는

부진했다. 2006년 4월 12일 잠실 LG전에서 선발로 나와 10개 탈삼진을 잡으며 프로 데뷔 첫승을

거두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본선에 국가 대표로 참가해 예선전인 캐나다 전과 결승전(대 쿠바)에

선발 등판했고, 캐나다전 완봉승을 포함, 17 1/3 이닝 동안 10피안타 13탈삼진 2실점 (평균 자책 1.04)의

뛰어난 성적으로 야구 국가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하며 병역도 해결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하였고, 2009년 3월 6일 벌어진 아시아 라운드 첫 경기

대만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3이닝 피안타 1개 탈삼진 3개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SK 와이번스의 김광현과 LG 트윈스의 봉중근과 함께 한국 프로 야구 3대 좌완 에이스로

꼽힌다. 그러나 사실 그는 공을 던질 때 외에는 오른손잡이다.[5] 야구선수 중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좌투우타이다. 2010년 아시안 게임 야구 국가대표로 출전하였으며 대만과의 결승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철벽 마운드를 구축,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큰 공헌을 세웠다. CJ 마구마구 일구상 최고투수상,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스포츠토토 uke6 . com 인터넷베팅 올해의 상 올해의 투수상,

조아제약 프로야구 대상 최고 투수상, 제16회 2010년 아시안 게임 야구 금메달,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최다탈삼진상,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방어율1위투수상,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상을

수상하고 방어율 1.82 전적 16승 4패 탈삼진 187개 등을 기록했다.

 

 

 

 

2012년 11월 9일 메이저리그 포스팅 시스템 기간이 종료된 결과 2573만7737달러33센트

(한화 약 279억8978만원)의 포스팅 응찰액을 받았으며[7] 최고 금액 입찰팀은 LA다저스로

밝혀졌다. 마침내 같은 해 12월 10일, LA 다저스와의 협상 끝에 계약 기간 6년 동안

총액 3600만달러(한화 약 390억원)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하였다.

 

 

 

 

 

 

 

 

 

 

 

  

 

 

박찬호
전 야구선수
출생1973년 6월 29일(충청남도 공주)
신체185cm, 95kg
소속사팀육십일
가족배우자 박리혜, 딸 박애린, 박세린
학력한양대학교 경영학 학사

 

 

 

 

1973년 6월 29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으며, 공주 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

육상선수에서 야구선수로 전향하였다. 이후 공주 중학교 3학년 시절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고,

공주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학교에 진학하였다. 한양대 재학 중이던 1994년 계약금으로

120만 달러를 받고 LA다저스에 입단,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였다.

한국에서는 등번호로 줄곧 16번을 달았으나 1994년 입단 당시 투수코치였던 론 페로나스키가

16번을 쓰고 있어 16을 뒤집은 61을 달게 되었다. 그토록 달고 싶어 하던 16번은

페로나스키 코치가 그만두던 1995년에 입단한 노모의 차지가 되었다.

 

 

 

 

박찬호는 1997년부터 선발투수로 활약하여 2001년까지 5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거뒀다. 1998년에는 방콕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참여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어

병역면제가 되었다.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였던 그는 2002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5년간 총액 6500만 달러(옵션계약에 의해 실제는 7100만 달러)를 받고 텍사스로 이적,

연평균 1300만 달러(약 150억 원)를 받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상으로 2002년 9승, 2003년 1승, 2004년 4승 등 부진한 성적을

나타냈다. 미국 언론은 박찬호의 텍사스 입단을 역대 가장 실패한 계약으로 꼽으며, 이른바

'먹튀'로 지목되는 불명예도 안았다. 2010년 말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 진출을 선언한

박찬호는 2011년 시즌 7경기에 등판해 1승5패 방어율 4.29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는 데

그쳤고, 결국 10월 24일 방출되었다. 박찬호는 2011년 12월 20일, 1년간 한국야구위원회

(KBO) 규약상 최저 연봉인 2400만 원에 한화 이글스와 계약하였다.

 

 

 

 


지난 1994년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지 17년 만에 한화로 이적하며,

국내 무대로 돌아온 박찬호는 구단에 연봉과 관련된 모든 것을 위임하였다. 이에 따라 한화는

4억과 옵션 2억을 포함, 총 6억 원 범위 내에서 유소년 및 아마추어 야구 발전을 위해

기부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등번호는 메이저리거 시절과 같은 61번을 달았다.

그리고 박찬호는 2012년 11월30일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7.02 11:17

안도미키 딸 낳고 눈물, 아빠는 '난리 야스하루' 난리났네~






안도미키 딸 낳고 눈물, 아빠는 '난리 야스하루' 난리났네~

 

일본 피겨계의 여왕 안도미키가 한동안 소식이 뜸하더니 어제는

돌연 딸을 출산했더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미 안도미키는 지난 4월에 비밀스레

출산을 해 공개했고 이 상황에서 사람들의 이목은 '과연 아빠가 누구냐'로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다름아닌 스케이터 난리 야스하루일거라고

일본 매체는 추측성 보도를 했다. 난리났네~

 

 

 

 

안도미키는 TV아사히 '보도 스테이션'에 출연해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안도미키는 출산 이후 그저 여성으로 살고

싶다는 순간적 결정 때문에 지난 4월 딸을 출산했고 엄마가 됐다고 밝힌 뒤

지난 2012년 10월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안도 미키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아 일본 팬들의

궁금증이 증폭됐었다. 때문에 일본 여론은 안도미키가 딸을 출산한데 대해 아버지로

스케이터 난리 야스하루를 지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 때 일본의 한 매체는

안도 미키가 니콜라이 모조로프와 결별 후 같은 피겨선수인 난리 야스하루와

열애 중이라고 발표한 적도 있다. 이게 2011년의 일이다.

 

 

 

 

안도 미키와 난리 야스하루는 주니어 피겨선수 시절부터 사이가 좋았고

가족끼리도 친한 것으로 알려졌다.난리 야스하루는 현재 일본 후쿠오카현

스케이트 클럽 소속 선수로 나이는 안도 미키보다 2살 많다. 그래도

안도미키는 딸을 출산한 이후에도 선수생활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한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6.19 10:37

박지성 김민지 데이트 포착! 비오는 날 우산 쓰고 열애설 인증






박지성 김민지 데이트 포착! 비오는 날 우산 쓰고 열애설 인증

 

박지성과 김민지 아나운서가 데이트하는 순간이 포착되었다.

바로 어제 18일 벌어진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이란과의 경기가

열리던 시각 서울 한강 공원에서 박지성과 김민지가 데이트하던 장면이

카파라치에게 딱 걸렸던 모양이다. 일전에 김사랑과 열애설이 나돌기도 했는데

이번엔 정말인듯 하다. 박지성과 김민지 열애설이 나오기 시작하자마자 네티즌들도

SBS 소속 김민지 아나운서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박지성과의 열애설 주인공인 김민지 아나운서는 SBS 12기 아나운서로

선화예술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집안도 빵빵한

듯 하다. 지난 2010년 KBS N 아나운서로도 활동하며 '2010 남아공 월드컵 리포트'

'아이 러브 베이스볼 시즌2'를 진행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하긴 이제 박지성도

나이 먹을만치 먹었는데 이쁜 샥시 만나서 장가갈 때가 되긴 했다.

 

 

 

 

김민지 아나운서는 현재 SBS 러브FM '김민지의 행복한 아침' '생방송 투데이'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풋볼매거진 골!' MC를 맡아 축구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인연이 되려고 해서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누구는 좋겠다.

지칠줄 모르는 심장을 가진 박지성과 연애도 하고. ㅋㅋㅋ

 

 

 

김민지 아나운서의 집안이 어느정도 빵빵하냐면 아빠는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김덕진 변호사이고 엄마는 수원대학교 오명희 교수라고 한다.

이런 괜찮은 집안의 둘째 딸이라고 하는데 대한민국 최고의 신랑감 중 하나인

박지성과 김민지. 과연 열애설 이후 결혼까지 가게될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6.19 09:45

2014 브라질월드컵 홍명보 감독 내정, 그리고 월드컵 최종예선 순위






2014 브라질월드컵 홍명보 감독 내정,

그리고 월드컵 최종예선 순위

 

어제 18일 치뤄전 이란과의 최종예선전  패배로 홍명보 감독이 예상했던

대로 차기 A 대표팀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현재로선 홍명보 감독이 내년에 있을

2014 브라질 월드컵 감독으로 가장 유력할 수 밖에 없다. 지난해 런던올림픽 이후

그런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었던 셈인데, 바꿔 말하면 축협입장에선 '언제 최강희 감독을

끌어 내리고 그 자리에 홍명보를 앉히느냐'하는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지 않았을까.

나름 열심히 임했던 최감독으로서는 명예롭지 않은 순간이지만,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의 자리란 늘 그래왔던게 사실이다.

 

 

 


18일 오후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열린 이란과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서 한국 대표팀은 후반 15분 레자 구찬네자드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0-1로 패배했다. 어처구니 없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우즈베키스탄은 대량득점을

올리고 있던 순간이라 자칫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 순위에서 밀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더 나아가 연속 8회 월드컵 본선진출이 좌절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행운은 대한민국을 빗겨나가지 않았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 순위에서 A조 2위를 유지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란전 패배를 통해 한국축구의 여러 문제점과 심각성이 대두되었고

이 때문에 홍명보가 차기 한국 국가대표팀 사령탑에 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한국은 이날 이란에 패했지만 4승2무2패(승점 14점)를 기록, 우즈베키스탄이

카타르에 5대1로 승리함에 따라 골득실 1골 차이로 A조 2위를 차지했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월드컵 본선 8연속 진출에 성공했다. 참으로 억세게 운이 좋은건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도 브라질로 향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아 보인다.

 

 

 

▲ 2002년 월드컵의 추억이 담긴 음악 2002 FIFA WORLD CUP ANTHEM

 

월드컵 최종예선 순위에서 A조 1위는 5승1무2패(승점 16점)를 기록한 이란이

차지했다. 이란과 대한민국에 이어 우즈베키스탄과 카타르가 각각 A조 3위와 4위에 올랐다.
B조는 일본이 승점 17점으로 1위를 기록했다. 이어 호주, 요르단, 오만, 이라크 순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대한민국과 이란, 일본, 호주가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은 2014년 6월 13일부터 7월 14일(한국시간)까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 쿠리치바 등 12개 도시에서 열린다. 예정대로라면 홍명보 감독이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될 확률이 높은데, 어게인 2002를 재현할 수 있을지

기대가 따른다. 하지만 남아있는 과제도 장난 아니다.

 

 

 

 

어쨌든 한국은 지난 1986년 멕시코월드컵을 기점으로 2014 브라질월드컵까지

내리 본선행에 성공, 브라질(20회, 2014년 대회 자동 진출 포함), 독일(15회), 이탈리아

(13회), 아르헨티나(10회), 스페인(9회)에 이어 세계 6번째이자 아시아 최초로 8회 연속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게 되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선 홍명보 감독이 사령탑을 맡아

어떤 활약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보다 중구난방으로 그때 그때 바뀌는 한국

축구대표팀의 시스템을 어떻게 확고히 끌어올릴 것인가가 사실 더 관심이 간다.

 

 

 

 

대한민국 축구는 사실 행정조직의 성격보다 정치조직에 더 가까운 냄새가 나는

'축협'의 일관성 없는 운영에 의해 2002년 이후 고유의 색깔을 완전히 잃어버린 느낌이다.

당시는 히딩크 감독이란 명장이 있었고 홈어드벤티지가 유리하게 작용했다고는 하지만

분명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한국축구에 선진국형 '체계'와 '조직력'이 가미되는

시스템화된 축국가 분명 생겨나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 늘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변하는 전시행정과 주먹구구식 축구로 다시 회귀했다는 인상이 든다. 이는

축구대표팀 감독 일인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 '축협'의 문제라는데에는

많은 축구팬들도 동감할 것이라 생각된다.

 

 

 

 

다행히 이번에 홍명보 감독이 내정되면서 안심이 되는건 '홍명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2009년 9월 U20월드컵부터 청소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아 8강에 이끌었고, 이후

런던올림픽팀까지 구자철, 김보경 등을 발굴해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심 선수로

성장시켜왔기 때문에 따라서 홍 전 감독은 특별히 선수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없다고 한다. 이제 2014 브라질 월드컵까지 1년여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홍명보만이 적임자로 꼽힐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한다.

 

 

 

 

 

 

 

 

 

 

홍명보

축구감독, 전 축구선수
출생:1969년 2월 12일 (서울특별시)
신체:182cm, 74kg
소속:대한축구협회 (이사)
학력: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데뷔: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 입단
수상:2013년 제8회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

 

 

 

 

'광장초 – 광희중 – 동북고'를 거쳐 고려대 시절 주목받는 수비수(DF)로

꼽히던 홍명보는 대학 재학 시절 여러 차례 세계 올스타에 선정됐으며 FIFA선수위원에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공수에 걸쳐 맹활약을 펼치는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로 자리를 굳혔다. 포항제철, 벨마레 히라쓰카, 가시와 레이솔,

포항 스틸러스 등의 프로팀에서 활약한 홍명보는 포항스틸러스 소속 당시인 1992년

프로축구 사상 최초로 수비수 출신 MVP를 수상했다. 1995년에는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선정한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로 뽑히기도 했으며, 2000년에는 일본의

가시와 레이솔에서 최초의 외국인 주장도 맡았다.

 

 

 

 

한편 홍명보는 1990년 2월 노르웨이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한 이후 한국선수로는

가장 많은 A매치 135회(10골)의 출장기록을 남겼고,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4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주장을 맡았는데, 이 대회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월드컵 최우수선수 3위에 해당하는 'FIFA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창립 100돌을 맞아 선정한 '현존하는

세계 축구 100대 스타(The FIFA 100)'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2002년 11월 대표팀에서 은퇴한 이후 2003년부터 미국프로축구리그(MLS)

서부콘퍼런스의 'LA갤럭시'에서 활약하다 2004년 10월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한 후에는

2006년 독일 월드컵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밑에서 코치를 담당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수석코치를 맡았다. 이후 2009년 2월 20세 이하 대표팀 감독을 맡아

그해 이집트에서 개막한 20세 이하 월드컵(U-20월드컵)에서 한국이 18년 만에 8강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또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동메달 획득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특히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은 2012 런던올림픽에서 주최국 영국과 영원한 숙적

일본을 차례로 격파하고 한국 축구의 숙원이던 메달 획득(동메달)에 성공하며

감독 부임 후 3년 만에 신화를 이뤄냈다.

 

 

 


리베로
 libero


수비수이면서 공격에도 적극 가담하는 선수. 이탈리아어로 '자유인'이라는 뜻이다.

중앙 수비수이지만 공격을 전개할 때 전진하여 중거리 슈팅이나 패스로 공격력에

도움을 주는 선수를 말한다. 스위퍼(sweeper)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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