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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6.12 15:03

번역가 이미도, 엔딩크레딧을 주름잡던 사나이






번역가 이미도, 엔딩크레딧을 주름잡던 사나이

 

지금은 덜 그렇지만, 90년대 영화들 중에는 극장에서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

올라갈 때면 어지간한 흥행작에는 모두 번역에 '이미도'라는 이름을 꼭꼭 보게 되었던거

다들 기억하실게다. 당시 '어떤 여자인지 영어공부 잘 해서 완전 싹쓸이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당시엔 30대였을

번역가 이미도씨는 1961년생으로 어느덧 쉰두살 나이가 되었다.

 

 

 

 

요즘은 그래도 전문 번역가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서인지 몰라도

좀 주춤하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이런저런 강연과 집필, 출판사 운영 등으로 이미도씨는

더 많이 바빠졌나 보다. 그러나 당시 그렇게 모든 작품을 싹쓸이한다고 했던 것도

알고보면 전체 수입외화들 중 고작 10% 정도만 번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다만,

흥행작을 많이 번역했다는게 차이라면 차이라고 해야할 듯 하다.

 

 

 

 

번역가 이미도씨가 번역한 외화는 처음 일을 시작한 줄리에뜨 비노쉬 주연의

'블루', '레드','화이트'시리즈를 시작으로 '반지의제왕', '슈렉', '인생은 아름다워',

'식스센스', '글래디에이터', '와호장룡' 등 약 500여편에 달하는 작품을

번역해 왔다. 1993년부터 번역가 일을 시작했다고 하니 올해로

20년 번역인생을 살아 온 셈이다.

 

 

 

 

한 때는 번역가 이미도시를 시기질투하는 무리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하생을 두고 자신은 이름만 올린다는 루머를 퍼뜨리기도 했다.

원래 똥통에서 노는걸 좋아하는 강아지는 다른 강아지도 똥통에서 노는줄 안다.

1년에 국내 극장가에서 상영되는 수입외화는 대략 350편~400편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중

이미도씨가 번역하는건 전체의 약 10%에 해당한다고 한다. 보통 영화 한편당 1주일의

번역시간을 소비하는 그는 한참 때 월 예닐곱편까지도 번역을 했었는데 나중엔

퀄리티 때문에 돈을 덜 벌더라도 한 작품에 정성을 더 쏟는다고 한다.

 

 

 

 

번역가 이미도씨가 번역하는 작품들 중에는 영어권 말고도 중국이나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영화들도 있는데 이는 그가 다수의 외국어에 능통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모든 영화는 영어대본이 함께 딸려 나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역되는 과정에서 원작의 훼손을 줄이기 위해 반드시

타국어 전문가에 번역을 따로 의뢰하여 참고하기도 한다.
 

 

 

 

여전히 미혼으로 살아가는 이미도씨인지는 확인 안해봤지만, 영화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고 한다. "번역은 영어보다 우리말을 더 잘해야 된다.

번역을 위해서는 꾸준히 책을 읽고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이 실제 쓰는

언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말이다. 오늘 아침 쓰레기 같은 번역알바들

욕을 걸쭉하게 해댔었는데 프로를 보고 좀 배웠으면 좋겠다. 평상시 책도

잘 안읽는 것들이 문화적 감수성도 없이 그저 영어 쪼금 깐쭉댔다고 알바를 하며

여기 저기 똥을 싸대고 있으니, 오죽 답답한 마음에 왕년의 번역가 이미도씨

이야기를 포스팅할 수 밖에 없었다. 보고 배우라고 말이다.

 

이미도

 

 

번역가, 작가
출생1961년 8월 13일
소속물고기도서관 (대표)
학력한국외국어대학교 스웨덴어학 학사
데뷔1993년 '블루' 번역경력물고기도서관 대표

 

 

 

 

주로 할리우드 영화의 영어대사를 한국어 자막으로 번역하였으며 1993년부터

20년간 약 450편 이상의 외화를 번역했다. 서울에서 태났으며 미군 통역관이자 도서관

사서였던 아버지를 통해 영어를 배웠다. 그의 이름 '미도(美道)'도 미국에 가서 살라는

의미로 아버지가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1988년 공군사관후보생 83기로 임관하여

공군 영어교육장교로 복무하면서 공군교육사령부 영어교육대대에서 해외파견요원에게

영어를 지도했다. 영어 교육 겸 군비디오 자료 번역일을 하였던 것이 번역가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웨덴어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서 광고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했으나 졸업은 하지 않았다.

 

 

 

 

[주요 저서]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 웅진지식하우스, 2008.01
 이미도의 아이스크림 천재영문법1,2,3, 파우스트, 2009.11~
이미도의 등 푸른 활어영어, 디자인하우스, 2004.11
 영화백개사전 영어백과사전, 물고기도서관, 2006.12
이미도의 영어 선물, 웅진지식하우스, 2010.03
 이미도의 영단어 타이틀매치, 뉴런, 2009.03
 이미도의 영어 상여관, 진명출판사, 2009.08
 별책 블로그, 물고기도서관, 2006.12

 

[번역 영화 대표작품들]


세가지 색: 블루,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 쿵푸팬더, 반지의 제왕,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글라디에이터, 진주만, 와호장룡, 인생은 아름다워, 

뷰티풀 마인드, 슈렉, 인디펜던스 데이, 아메리칸 뷰티, 제리 맥과이어,
피스메이커, 시카고, 더록, 식스센스, 영웅 등 약 450편 이상

 

 

 

 

 

 

 

 

 

 


  • Favicon of https://mook1023.tistory.com 세친구 2013.06.13 00:24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단숨에 끝까지 쉼없이 읽었네요. 이미도 늘 궁금했던 그사람이군요.내용이 너무 좋네요. 이런건 메인페이지에 올라가야 하는데...

    • Favicon of https://speciallotto.tistory.com 사색하는남자 스페샬로또 2013.06.13 08:32 신고 수정/삭제

      어익후~ 별 말씀을요.^^; 감사합니다.
      평상시 궁금한게 너무 많습니다.
      잊고 지냈던 사람, 영화 등등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네요.
      오늘 또다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고 합니다. 건강 유념하시구요~^^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6.08 10:08

손연재 첫 금메달, 체조역사를 새로 쓰다!






손연재 첫 금메달, 체조역사를 새로 쓰다!


손연재가 첫 금메달 소식을 안겼다. 7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열린 

'2013 리듬체조 아시아선수권대회' 개인종합 결선에서 1위에 오르면서 한국 리듬체조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한다. 

지난해 런던 올림픽 이후 계속 은메달에 머무는 소식만 들려오던 중 

손연재 첫 금메달 소식이 전해져 모두들 반기는 분위기이다.





손연재의 첫 금메달 소식은 개인종합 결선에서 4개 종목 합계 72.066점으로 

1위에 오른 것으로 한국 리듬체조의 숙원이었던 첫 국제대회 우승을 이뤄낸 것이라고

한다. 전날 열린 개인종합 예선전에서 1위를 차지하며 결선에 오른 손연재는

첫 종목인 후프에서 푸치니의 '투란도트'에 맞춰 연기했는데, 잠깐 후프를 놓치는 실수가

있었지만 우아한 연기력으로 만회하면서 18.033점으로 괜찮은 출발을 했다.





두 번째 종목인 볼에서는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웨이'에 맞춰 가장 높은

18.267점을 획득했고, 전날 예선에서 17점대에 그쳤던 곤봉 종목도 181.33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종목인 리본에서 연기 초반 실수가 있었지만 침착하게 나머지 

연기를 이어가면서 17.633점을 받았다. 결국 합계 70.599점으로 2위에 오른 

우즈베키스탄의 자밀라 라크마토바를 제치고 손연재는 첫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실수가 몇 차례나 있었음에도 이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데에는 심리적으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연기한 손연재의

마인드 컨트롤이 크게 작용한 듯 보인다.

 


 

▲ 손연재 Son Yeon Jae, WC Pesaro 2013 EF Ribbon

 

이번에 손연재가 첫 금메달을 거머쥐게 된 것은 지난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이후 3년 동안 더욱 성장하여 마침내 아시아선수권 

금메달을 따내면서 아시아 리듬체조 최고의 '별'로 떠올랐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아시아선수권에서 지난 2006년 대회 신언진과 2009년 대회에서 신수지가 개인종합 

동메달을 획득한 것이 최고 성과였던 한국 리듬체조는 손연재의 첫 금메달을 

통해 명실상부 아시아 체조 강국으로 한 걸음 더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손연재의 첫 금메달이 가져오는 역사적 의의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6.07 09:31

마이클 잭슨 딸 자살 기도, 그리고 마이클 잭슨에 대한 추억






마이클 잭슨 딸 자살 기도, 그리고 마이클 잭슨에 대한 추억

 

지난 2009년 6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어제는 

마이클 잭슨 딸 자살 기도 소식이 전해져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CNN 등

다수의 외신 보도에 의하면 올해 열다섯살인 마이클 잭슨의 딸 패리스가

캘리포니아주 칼라바사스에 위치한 자택에서 자살을 기도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지 4년만에 그의 딸에게 또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게

아니냐며 전 세계 팬들이 가슴철렁해 해야 했었다.
 

 

 


마이클 잭슨의 딸 패리스가 자살을 기도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인 마이클 잭슨의 사망 관련 소송에서 증언을 해야 하는 압박감

때문인 것으로 추측돼고 있다. 게다가 마이클 잭슨의 딸 패리스는 자살을 기도하기 전

최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불안함 심경을 드러낸 적이 있어 심리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마이클 잭슨의 딸 패리스의 자살 기도는 진통제의 한 종류인 모트린을

과다 복용한 후 손목을 칼로 그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다.

 

 

 

 

생전에 마이클 잭슨은 여러가지 루머에 시달려야 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팝 아티스트이자 팝의 황제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는 것과 

어린이들을 무척 사랑했고 평화를 사랑했다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생전 불렀던 'Heal The World'를 들으며 상처받은 딸 패리스가

어서 빨리 회복되어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 Michael Jackson- Heal The World (Magyar felirattal)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Michael Joseph Jackson)

가수
출생:1958년 8월 29일 (미국)
사망:2009년 6월 25일
신체:180cm
가족:아들 프린스 마이클 잭슨, 프린스 마이클 2세, 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동생 자넷 잭슨, 형 저메인 잭슨, 티토 잭슨, 재키 잭슨, 말론 잭슨, 누나 라토야 잭슨
데뷔:1969년 잭슨파이브 1집 앨범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
수상:2010년 제52회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

 

 

 

 

마이클 잭슨의 본명은 마이클 요셉 잭슨(Michael Joseph Jackson)으로,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는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어머니와 팔콘스(The Falcons)라는 그룹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경험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음악적인 영향을 받고 자라났다.

 

 

 

 

마이클 잭슨은 1963년 5세 때부터 형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Jackson 5)'란 그룹으로

활동하며 메인보컬을 맡았다. '잭슨 파이브'는 1968년 모타운(Motown) 레코드사와 계약한 후

1969년 최초의 싱글 음반 을 발표하였으며, 이어 첫 번째 앨범 의 수록곡 , , 까지 4곡

모두 전미 빌보드차트 1위를 기록했다. 1971년부터 솔로로 데뷔한 마이클 잭슨은 14세였던

1972년 발표한 으로 다시 차트 1위를 차지했다.1975년 모타운에서 독립한
마이클 잭슨은 프로듀서 퀸시 존스(Quincy Jones)를 만난 이후 1979년 솔로 앨범 을

발표하며 당시 150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 앨범으로 1980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R&B 가수상을 수상했다.

 

 

 

 

1982년 발표된 앨범 <스릴러(Thriller)>는 전 세계에서 1억 4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최다판매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수록곡 , , , 등 7곡이 빌보드

10위 안에 들었으며, 37주 동안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올랐다. 마이클 잭슨은 이 앨범으로

198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프로듀서상, 올해의 앨범상, 최우수 R&B 보컬상,

최우수 록 보컬상을 비롯해 총 8개 부문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1983년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최초 공개된 안무 문워크(Moonwalk)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달 표면을 유영하듯 미끄러진다는 뜻의 문워크는 마이클 잭슨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성형수술 및 아동 성추행 의혹 등

사생활을 둘러싼 논란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아왔다. 활동 초기에만 해도

흑인의 검은 피부였던 마이클 잭슨은 멜라닌 색소가 파괴되는 희귀질병인 '백반증'으로

인해 백색 반점이 피부를 뒤덮기 시작했고, 1984년 펩시콜라 광고촬영장의 화재로

머리에 화상을 입으면서 증세가 악화돼 결국 온몸이 하얗게 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타블로이드지의 가십거리로 악용되며, 백인이 되기 위해 박피수술을

받았다는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1988년 캘리포니아 주에 건립한 자신의 대저택

'네버랜드'에서 1993년에 13세 소년을 성추문한 혐의로 피소되었다. 잭슨은 혐의를 부인했고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1995년 소년의 부모는 법정 외 합의금으로 22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이 사건은 훗날 소년의 아버지가 꾸민 사기극으로 밝혀졌다. 2003년에도 사기전과 범죄자가

자신의 아들을 성추행했다며 잭슨을 고소했으나, 마찬가지로 무혐의 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Lisa Marie Presley)와 1994년

결혼하여 19개월간 결혼생활을 지속하다 이혼했으며, 1996년 간호사인 데비 로우

(Debbie Rowe)와 재혼하여 아들 프린스 마이클 주니어(Prince Michael Jackson Jr.)와

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Paris-Michael Katherine)을 낳았으나 1999년 이혼했다.

2002년에는 대리모를 통해 인공수정으로 셋째 프린스 마이클 2세

(Prince Michael Ⅱ)가 태어났다.

 

 

 


한편 2009년 7월부터 영국 런던에서 앨범 발매공연이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저택에서 급성 프로포폴 중독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인(死因)은 잭슨의 주치의 콘레드 머레이(Conrad Murray)가 수면마취제인

프로포폴을 치사량 주입했기 때문으로 드러났다. 그의 사후에 2010년 제52회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을 수여받았으며, 잭슨의 자녀들이 대리 수상했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6.04 17:53

변두섭 예당엔터테인먼트 회장 별세 소식 그리고 가수 양수경






변두섭 예당엔터테인먼트 회장 별세 소식 그리고 가수 양수경

 

변두섭 예당엔터테인먼트 회장이 과로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나중에 올라온 소식을 확인하니 서울 서초구 예당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내용이 정정되었다. 그 바람에 아침부터 예당 홈페이지가

접속이 폭주로 마비돼기도 했었는데 다시 알고보니 이번에 숨진 변두섭 회장의

아내는 과거 80년대 가수로 이름을 날렸던 양수경씨라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가수 양수경은 1967년생으로 지난 1988년 1집 앨범 '떠나는 마음'으로 데뷔해

90년대 초반까지 왕성한 가수활동으로 1994년 동유럽 가요제 백야축제 대상과
1992년 ABU 국제가요제 최우수인기가수상을 수상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렸었다.

 

 

 

 

올해 불과 5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변두섭 회장은 1959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10대에 상경해 레스토랑

DJ로 일하던 1980년대 초 예당기획을 설립하고 가요계에 뛰어들어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해내며 그동안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려왔었다. 변두섭 회장은 매사에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최근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크게 받아왔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특히 오늘날 가요계 산업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고자 노력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수 양수경씨와는 지난 1988년 결혼해 화재가 되기도 했고 슬하에 1남1녀의

자녀를 두면서 연예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자수성가형으로 꾸준히 사업을 키워왔다.

또 지난 2000년에는 예당기획에서 지금의 예당엔터테인먼트로 상호를 변경하고,

2001년에는 코스닥 업체로 등록하는 등  30여년 간 꾸준한 성장을 이끌어왔다. 

 

 

 

 

 

그동안 변두섭 회장은 양수경, 듀스, 룰라, 서태지, 양현석, 조PD, 이정현,

원타임, 이승철 등 수많은 가요계 스타들을 배출하고 앨범을 제작해 히트시킨 바 있다.

예당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가수로는 임재범, 조관우, 알리, 국카스텐 등이 있다

 


 변두섭

전 음반사대표

출생: 1959년 1월 15일 (전남 화순)

사망: 2013년 6월 4일

가족:슬하 1남 1녀

경력:2013.06 예당엔터테인먼트 회장
1996 한국연예제작자협의회 이사
1996 한국영상음반협회 이사
1992 예당엔터테인먼트 설립

 

 

 

 

 

 

 

 


  • Favicon of https://www.walkview.co.kr 워크뷰 2013.06.05 05:40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아니 이런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네요^^
    예당이면 좋아하는 엔터테인먼트였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5.30 10:53

이종환 별세, 한국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DJ 폐암으로 운명






이종환 별세, 한국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DJ 폐암으로 운명

 

이종환씨가 별세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얼마전 방송인 박상규씨의 비보에 이어 과거 70년대를 전후로 종횡무진 활동했던

유명인사들이 하나둘 또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DJ로 불리우던

이종환씨는 폐암 투병 끝에 향년 76세로 30일 새벽 1시쯤 생을 마감했다. 지난 2011년

폐암 진단을 받은 뒤로 줄곧 암투병으로 치료에 전념하던 故 이종환씨는 약 열흘전부터

서울 노원구의 자택에서 지내오다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다고 한다.

 

 

 

 

故 이종환씨는 특유의 감칠맛 나는 목소리와 더불어 과거 라디오 매체가

절대적인 시절 많은 팬들을 끌어모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 특유의 입담을 통해

방송 토크 프로그램에 관심을 기울였고, 나중에는 DJ보다 MC로 더욱 주가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1964년 MBC 라디오 PD로 입사해 방송계에 입문했고 1980년대

MBC 라디오 FM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DJ를 맡아 청취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현재 라디오에서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가 방송돼고는 있지만

사실 이종환씨가 하던 때 인기는 10여년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최고였다.
때문에 당시 국내 최장수 DJ이자 국민 DJ로 방송 관계자, 청취자들로부터 인정받았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MBC로부터 제1회 골든마우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I've been away too long 조지베이커셀렉션&이종환

 

故 이종환시는 그러나 2003년 술에 취한 채 MBC FM 4U '이종환의 음악살롱'을

진행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당시 전라남도 목포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술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듣는 사람이 위태로울 정도의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다가 거센 비난으로

홈페이지에 음주사실을 시인하고 DJ를 사퇴했다. 이후 SBS 라디오를 통해 복귀하려

했으나 네티즌과 노조의 반발로 무산됐고, 2년간 마이크를 잡지 못하기도 했었다.

 

 

 

 

故이종환씨는 2005년에야 교통방송을 통해 겨우 복귀했다. 그리고 2007년 10월

MBC 라디오 골든 마우스 시상식에 시상자로 나서 "술만 끊었으면 저도 이보다 화려한

자리에 설 수 있을텐데…"라며 음주방송에 대해 후회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게 된 故 아종환씨는 2011년 11월 자신이 진행하던

TBS 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이종환의 마이웨이’ DJ에서 물러난 후 그동안

치료에 전념해왔으나 2013년 5월30일 끝내 자택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발인은 6월 1일이다.

 

 

 

 

 

 

이종환

(1937년 12월 7일 ~ 2013년 5월 30일)

 

 

 

충청남도 아산 출생

방송 MC, DJ

서울 경복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법학과 전퇴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수상 MBC 골든마우스

[저서] '팝송은 죽었다'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했고, 음악감상실 '디쉐네' DJ로 활동하다가 1964년

MBC 라디오 PD로 입사했다. 임국희 아나운서가 진행한 '한밤의 음악편지' 프로듀서를

시작으로 '탑튠 퍼레이드'의 PD와 DJ를 겸하며 라디오 DJ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후

심야 시간대에 팝 프로그램 경쟁이 붙으면서 별밤로 옮겨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

그 후 MBC 라디오 컬러쇼,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지금은 라디오 시대 등을 진행했으며

그 중 최유라와 진행하였던 MBC 라디오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10여 년 이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했고, 이 프로그램으로 '방송 대상'을

받기도 했다. 여성시대, 라디오시대 등을 진행했다.

 

 

 


하지만 음주 방송과 청취자와의 잦은 충돌로 결국 방송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한동안 진행하지 못하다가 TBS로 복귀해 달빛으로 가는 자동차, 이종환의

마이웨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2011년 가을부터 폐암 투병으로 방송을 진행하지

못하면서 일주일이 넘도록 임시 진행자가 진행하다 TBS 가을 개편으로

2011년 11월 14일부터는 마이웨이의 진행자가 가수 이상우로 변경되었다.

 

 

 

▲ 방송인 이종환 폐암투병 소식(2012.11.18)

 

이종환 사단

 

이종환은 사람을 사귀는 재주가 좋아서 항상 주변에 사람들이 몰렸고,

`이종환 사단'이라고 불리면서 이종환을 따르는 가수들도 있었다. 이종환은 신인 가수를

스카우트해서 음반을 내주는 등 레코드 제작에도 관여했고, 외국 곡의 번안 작업에 나서 여러

편의 작사를 하기도 했다. 가수 이장희는 연세대학교 생물학과 중퇴 출신으로 1971년

이종환의 권유로 1집 '겨울이야기'를 냈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이

이종환 사단으로 불린 가수들이었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5.27 11:26

추억의 영화평론가 정영일(鄭英一)씨, 80년대 '명화극장' 영화해설가로 기억






추억의 영화평론가 정영일(鄭英一)씨, 80년대 '명화극장' 영화해설가로 기억

 

영화평론가 정영일씨를 기억하려면 아무래도 '명화극장'을 즐겨보았어야

할 것이고 지금 나이가 적어도 30대 중후반 이상은 돼어야 기억하지 않을가 생각해

본다. 나도 당시 흑백TV화면으로 정영일씨가 주말이면 화면 한쪽에 자리잡고

영화소개를 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당시엔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검은 뿔테안경에 노타이 정장차림으로 차분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영화소개를 하던 그 모습이 매우 근사해 보였었다.

 

 

 

 

정영일씨는 1928년에 태어나 7,80년대 당시 거의 유일했던 영화평론가로

확고한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했고 신문과 방송, 라디오 등에

영화평론을 기고, 방송에도 많이 출연했던 낭만적인 영화광으로 기억들 한다.

80년대 당시 명화극장 영화소개 외에도 라디오 프로그램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에도

출연했고, 원종배씨와 '사랑방중계'에도 게스트로 출연했었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 8월25일 간암으로 작고했다.
청룡영화제 평론가상은 한때 1994년 '정영일 영화평론상'이란 이름으로

제정돼 중견영화평론가들이 수상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당시 영화들은 원래가 흑백영화들인 경우도 많았지만, 80년대

초만해도 일반 대다수의 가정집은 여전히 흑백티비가 주를 이루었었다. 지금도

칼라사진 보다는 모노톤의 흑백사진이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듯 수십년 세월이

흘렀어도 흑백영상을 통해 접한 영화들은 기억에 오래남는 것 같다.

 

 

 

▲ 명화극장 시그널뮤직, Max Steiner가 작곡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중

'타라의 테마(Tara's Theme)'를 The Clebanoff Strings가 편곡하여 연주한 곡이라고 한다.

 

정영일씨가 이번주 명화극장 영화소개를 할 때면 뒤로 보여지는 영상은

성우들이 더빙하기 전의 원본영상이 흘러나왔었다. 그리고 정영일씨는 영화소개 시

정말 재미있는 영화,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일 때는 '이 영화 놓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다. 물론 별로인 영화일 경우는 '배우들의 연기가 좋습니다.'라고

소개했을 만큼, 자기주관이나 영화에 대한 철학이 분명했던 분으로 기억된다.

 

 

 

 

일화중에 소설가 최인호씨는 TV에서 이번주 명화극장을 소개할 때 정영일씨가

웃고있으면 보고 표정이 굳어있으면 보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는 확실히 보아야 할 영화일

경우 '꼭 보셔야 할 영화, 놓치면 후회할 영화, 놓치면 안될영화'등으로 마무리했고
실제로 그런 영화들은 확실히 기억에 오래 남을 정도로 좋은 영화였다고 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는, 지금은 영화평에서 별점을 주는 것이 일반화

되었지만 당시 이러한 시도는 정영일씨가 처음 시작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별안간 생각난 영화평론가 정영일씨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그에 대한 기억에

짧게나마 포스팅해 보았다. 요즘은 다재다능한 영화평론가들이 다채로운 미디어와 함게

많기는 하지만, 보다 더 확고하게 자신의 철학과 색깔을 통해 영화팬들에게

의미전달을 해줄 수 있는 정영일씨같은 영화평론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만큼 어쩌면 오직 추억일 뿐일지도 모른다.

 

 

▶ 관련포스팅: 토요명화 시그널뮤직 '아랑 후에즈'듣기

 

 

 

 

 

 

 

아쉬워진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5.24 11:17

최근 일베 논란과 함께 떠오르는 매카시즘(McCarthyism)






최근 일베 논란과 함께 떠오르는 매카시즘(McCarthyism)

 

요즘 518을 전후 해 일부 종편방송과 나이어린 일베회원들의 무분별한 활동이

사회문제로 떠올랐었다. 지각있고 양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개탄의 목소리와 탄식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라디오를 듣가가 앵커가 말했던 '매카시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적 있는데 싶을텐데 이 말은 지난 2001년

미국의 911테러 이후 조지 부시 행정부가 보여준 일련의 강경분위기 속에서

다시 한번 흘러나온 말이기도 했었다.

 

 

 

 

911테러 이후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지는 보복 작전과 애국법. 부시독트린 등

많은 용어들이 새롭게 만들어졌고 럼즈펠드 국방부장관을 중심으로 '충격과 공포'작전이

수행되는 내내 뒤를 따라다니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매카시즘'이었다.

 

 

 

 

결국 911테러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오사마 빈라덴은 마국의 새로운 정부

버락 오바마 정부에 들어서 치밀한 군사작전과 함께 빈라덴을 찾아내 사살하고 모든

상황은 일단락 된 듯 하다. 물론 911테러 자체 음모론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빈라덴을 둘러싼 의혹과 진실공방이 계속 되었지만 여하튼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과거 50년대 미국사회를 강타했던 '매카시즘'을 떠올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래서 요즘 한국사회를 보노라면 마찬가지로 일베 등 일부 보수층의

지나친 활동을 지켜보면서 '매카시즘'이란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매카시즘 

McCarthyism

 

요약: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반공사상(反共思想)으로, 현재에는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집단에서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매카시즘은 미국 위스콘신 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당시 상원 국내치안분과위원장이었던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Joseph R. McCarthy)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조지프 매카시

(조셉 매카시)

Joseph Raymond McCarthy
정치인
1908년 11월 14일(미국) ~ 1957년 5월 2일
학력:마케트대학교 법학 학사
경력:1950.02 미국 비미활동위원회 위원장

1947.01~1957.03 미국 위스콘신주 공화당 상원의원

 

 

 

 

미국 위스콘신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R.매카시의 이름에서 나온 말로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폭탄적인 연설에서

발단한 것이다. 1949년 이래 수년에 걸쳐 매카시가 상원의 비미(非美)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행한,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국자본의 시장이던 중국의 공산화와

잇달아 발생한 한국의 6 ·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국민으로부터, 그의 주장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이 발언이 발단이 되어 미국은 수년 동안 이에 대한 논란으로 들끓었다.
매카시는 국무부의 진보적 성향을 띤 100여 명에 대해 추방을 요구했으며 많은 지도층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였다. 특히 1938년 하원에 설치된 비(非)미활동위원회를

중심으로 펼쳐졌는데, 반대파 정치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는 것은 물론,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과 트루먼 대통령의 페어딜 등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진보주의 정책까지 공산주의와 연계시켜 심판대에 올렸다.

 

 

 


매카시 여파는 또 예술계와 언론계에까지 미치면서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를 낳았다.
할리우드 영화계와 방송계의 작가ㆍ감독ㆍ연예인 가운데 수십 명이 공산주의자라는

멍에를 쓰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매카시즘이 먼저 공격목표로 삼은 것은 중국정책에 영향력이 컸던 외교관,

국무성 및 중국통 정치학자 오언 래티모어, 국제법학자 제삽 등이었는데, 대통령 H.S.트루먼도

공산주의자에게 약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다.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의 보수 강경 분파가 전시 총동원체제로부터 전후체제로 순조롭게

체제를 재편성하고 헤게모니의 기반을 다지고자 의도적으로 일으켰던 이 공산주의자 사냥은

미국 국내외로부터, 심지어 당 안에서도 격렬한 비판에 부딪혀 국제관계에서의 긴장 완화와

더불어 점차 수그러들었고, 매카시는 공무원과 육군장교를 공산주의자로 고발한 사건을

계기로 1954년 12월 육군에 도전한 이 일들이 결국 치명상이 되어서

마침내 1954년 상원의 사문결의(査問決議)에 의하여 실각하였다.

 

 

 


당시 국무장관 덜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다.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매카시는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도 그가 말한 공산주의자가
누구인지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

 

 

 


그의 공격적 발언은 갈수록 심해져서 마침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 지도부, 육군 장군들까지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으나,

1954년 국회 청문회에서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발언으로 판명되었다. 청문회 당시

육군측 변호사들은 집요하게 추궁했는데, 이에 대해 매카시는 흥분하며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고 당시 이 모습을 36일간의 텔레비전 생중계로 본 미국 국민들은 더 이상

매카시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1954년 12월 상원은 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의제로 올려, 67대 22로 그에 대한 비난을

의결하였다. 미국 민주당에서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를 제외한 의원 전원이 찬성

하였다. 케네디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유로 불참하였는데, 실제로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참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한편 매카시 의원의 소속 정당이었던 미국 공화당에서도 상당수 의원들이 찬성하여
비난 결의안이 통과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상원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매카시는 미치광이 혹은 간신모리배 등에 비유되었다. 이에 크게 상심한 그는

이전부터 앓아오던 두통과 조증을 해소하고자 더욱 술에 의존하게 되면서 알코올 중독의

나락에 빠지게 되었다. 상원의원의 직위는 유지했으나, 거의 활동은 할 수 없었고,

공화당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건강을 잃어 1957년 만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식에는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양당의 여러 의원들이 참석하였다.

 

 

 

 

매카시는 히틀러와는 달리 아무런 비전도 가지지 못하였으나, 보기 드문 선동가였다.

광적이다시피 집착하는 일방적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와 지나친 반공주의는 결국1950년대

미국을 매카시즘 광풍으로 몰아넣게 되는데 그가 미친 영향은 미국의 대외적

위신이나 지적(知的) 환경 등에 끼친 손해는 막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5.24 10:53

숀리 혈관나이 7살 초딩 수준이라는데 그럼 나는?!






숀리 혈관나이 7살 초딩 수준이라는데 그럼 나는?!

헐리우드 영화 '트리플X' 나 영화 '300' 등에서 몸 만들기 트레이너로

활동해 온 숀리의 혈관나이가 7살 초딩 수준이라고 한다. 항상 운동이 생활화 되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삶', '인생' 그 자체인 사람인데 이런 소식이

그닥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보인다.

 

 

 

 

스포츠트레이너 숀리는 올해 35살로 본명은 이승환이다.

숀리의 혈관나이가 공개된 건 지난 23일 방송된 SBS ‘좋은 아침’에서

혈관 나이를 측정해 나온 결과이며, 실제나이보다 28년이나 내려 간 7세 초등학생

수준의 건강한 혈관을 지닌 것으로 진단 받았다고 한다.

 

 

 

 

숀리의 혈관나이는 최고수치인 A등급인 셈이다. 네티즌들도

20대 초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오고 언제나 건강관리를 하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냐는 반응들이다.

 

 

 

 

일반인들은 날마다 술담배 커피, 삼겹살 등등 그닥 건강에 좋지않은

식생활 습관과 더불어 운동하면서 살만큼 시간적 여유도 없는게 핑계일지는 몰라도

현실이 그렇다. 그래서 숀리의 혈관나이를 알고는 그저 부러워할 따름이다.

 

 

 

 

숀리

본명:이승환

스포츠트레이너, 기업인

출생:1979년 5월 29일 (서울특별시)

소속:숀리바디스쿨 대표

학력:조지브라운대학

수상:2010년 SBS 연예대상 특별상
2009년 WBFF 월드 보디빌딩 챔피온십 한국 대표 은메달

경력:USPTA 코리아 트레이너 총괄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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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제법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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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현실 속의 300이네. 와우~ 쩐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5.23 13:55

노무현 전 대통령 4주기,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 4주기,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4주기 되는 날이다.

지난 2009년 오늘 임기를 마치고 고향 봉하마을 내려가 편안히 노년을 보낼

것으로 그의 지지자들과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렇게 기대했었지만, 여러가지로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끝내 마감하게 되었다.

 

 

 

 

보도와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붕어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사망하게 되었다라는 것이 공식적인 내용이고, 또 아직까지도

공식적인 역사기록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前 대통령을 좋아하지는

않았어도 당시 이러한 정황들에 대해 이건 보통 이해가 안되는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솔직히 정치적으로 누굴 지지하고 말고를 떠나

아직까지도 이건 적어도 자살보다는 타살에 가깝다라고 믿는다.

 

 

 

 

생각보다 '현실'이라는 것이 거의 악마수준으로 잔인하구나라는

무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그게 정치권력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면, '상대가 누구였던(전직 대통령이었던)간에 '제거'가 가능하구나'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타살의혹은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온라인을 달구고 있다.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4주기를 맞아 각 정치단체 등은 그를 추도하며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빠 보인다. 서거 당시 그리고 직후 치뤄진 장례 등의 일들이 엇그제

일인듯 하더니 어느새 4년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도 전혀 '진실'은 모르는 일이다.

언론보도 뿐 아니라 이명박 정권에서도 국가적으로 그렇게 밝혔고 또 그렇게

넘어가면서 역사 속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은 그냥 그렇게 묻혔다.

 

 

 

 

공식적으로 결론이 났으니 이후 갑론을박하며 노무현 타살설을

이야기 하고 타살증거라며 온라인상에서 여러글들이 올라오고 반반글도

올라온다. 하지만 아무리 떠들어봐라. 죽는 날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을 테니까. 그걸 전제로 일어난 일 아니겠는가.

 

 

 

 

진짜 진실이 밝혀지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그런 세상이다. 정치란 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민이 가장 존경하던 존 에프 케네디도 '필연'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게 정치다. 꼭 위대해서만은 아니다. 존경을 받는다 해도

정치외교 등 일반인들이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속에서 바로 그 타이밍에 누군가 지워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4주기를 맞이 한 오늘.

나는 정치적 성향이나 노선, 정파 따위를 모두 떠나 그냥 한 인간으로서

궁금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왜 그렇게 사라져야만 했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도

빨리 잊혀지고 묻혀져야 했는지, 그 어떤 정황근거를 보고 또 보아도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석연치 않을 뿐 아니라 납득이 가질 않는다.

 

 

 

 

 

 

 

 

  

 

 

 

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5.17 13:59

베컴 은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변치않던 축구선수로서의 위엄






베컴 은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변치않던 축구선수로서의 위엄

 

어제 외신에서는 영국의 추구스타 데이비드 베컴(David Beckham)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고 보도했다. 베컴의 친정, 멘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이 얼마전 은퇴를 발표한 뒤로 나온 또다른 은퇴소식이라 축구팬들로서는

유독 아쉬움이 클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잉글랜드 국가대표로서 뿐만 아니라

프리미어리그에서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스타 중에 스타로 화려한 축구인생을

이제 막 마무리할 때가 온 듯 하다. 하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베컴의 은퇴 소식이

너무도 아쉬울게 뻔하다. 과거 스파이걸스의 멤버로 활약했던 빅토리아 베컴의

남편으로도 주목받던 그의 화려했던 축구 인생을 되돌아 본다.
 

 

 

 

베컴은 은퇴를 공식적으로 밝히는 자리에서 "지금이 선수 생활을 끝낼

적당한 시기"라며 "마지막 기회를 준 파리 생제르맹 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또 덧붙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우승까지 차지하고 국가대표를 거쳐 세계적인

명문팀에서 뛴다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 꿈이었다"며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것은 대표팀 주장을 했다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베컴은 이번 시즌 프랑스 프로축구 파리 생제르맹으로 옮긴 뒤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선수 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1993년 잉글랜드 프로축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베컴은 2003년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2007년 로스앤젤레스 갤럭시(미국)를 거쳤으며 2009년부터 2년간

이탈리아 프로축구 A.C 밀란에서도 활약했다.

 

 

 


 

데이비드 베컴

(David Beckham)
축구선수
출생:1975년 5월 2일
신체:183cm, 76kg
소속팀:파리 생제르맹 FC (MF (미드필더))
가족:배우자 빅토리아 베컴,

아들 브루클린 베컴, 로미오 베컴, 크루즈 베컴, 딸 하퍼 세븐 베컴
데뷔:199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입단
수상:2012년 ESPY 어워드 MLS선수상

 

 

 

 

베컴은 개인 통산 718경기에서 129골을 터뜨렸다.

또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115경기에 출전해 17골을 기록했다. A매치 115경기

출전은 잉글랜드 필드 플레이어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베컴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배우 뺨치는 외모와 스타성을 겸비, 축구선수를 넘어 대중문화적

신드롬을 일으킨 '스포테이너'로 평가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이처럼 뛰어난 외모와 스타성 때문에 축구선수로서의 업적이 저평가

받았다는 의견도 있어왔던게 사실이다. 베컴은 1993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알렉스 퍼거슨 감독

애제자로 꼽히며 라이언 긱스, 게리 네빌, 폴 스콜스 등과 함께 맨유 전성기를 이끈

소위 '퍼기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돋보인 스타였다.

 

 

 

 

1999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사상 최초의 트레블(자국 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면도날같이 정확한 프리킥과 '택배' 크로스는

베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원제:Bend It Like Beckham,2002)

처럼 그의 이름과 슈팅능력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영국 총리로 등장한 휴 그랜트 대사를 통해 영국이 배출한 위인으로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해리포터와 함께 '데이비드 베컴의 오른발'이 꼽히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의 베컴이 영국 사회에서 누리는 인기와 지명도는 대단했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99년에는 당시 영국의 최고 인기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 멤버 빅토리아 아담스와 결혼, 세기의 스타커플 탄생을 알렸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세 차례나 월드컵에 출전해 남자들의 스포츠로 불리는

축구에서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여성 축구팬들까지 만들어냈다.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베컴은 스포츠를 넘어서 세계적인 패셔니스타로도 명성을 떨쳤다.

 

 

 

 

 

 

각종 세계적인 명품 패션 브랜드의 모델로 발탁되는가 하면, 부인과 직접 향수

브랜드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선보인 이른바 '닭벼슬 머리'는

세계적인 유행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베컴은 어디까지나

축구선수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잠깐의 대중적 인기에 취해 자기관리에

실패한 스포츠스타들과 베컴이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 [CF] David Beckham Galaxy Note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언제나 축구였고,

그런 열정과 철저한 자기관리를 바탕으로 베컴은 동시대의 어느 축구스타보다도

장수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베컴은 2003년 퍼거슨 감독과의 불화로 맨유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이후 이탈리아 AC밀란, 미국 프로축구 LA 갤럭시,

다시 프랑스 파리 생제르망 등 수많은 리그를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우승을 경험했다.

4개리그에 걸쳐 우승은 경험한 것은 영국 선수로서는 최초다.

 

 

 

 

보통 영국 출신 선수들이 자국무대를 벗어나지 않고, 해외무대에서는 자국만큼

인상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행보였다. 세월이 흘러 퍼거슨 감독과

화해하며 베컴은 때로 맨유를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맨유를 떠난 이후에도 베컴의

커리어는 손색없을 만큼 훌륭했다. 잉글랜드 대표팀 유니폼에 애착이 컸던 베컴은

정작 국제무대에서는 만족할만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잉글랜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3회의 월드컵에 출전했고, 그 중 두 번의 대회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뛰었다.

 

 

 

출전한 대회에서는 모두 골을 넣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번번이 8강 징크스에

눈물을 흘렸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1998 프랑스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서는

신경전 끝에 상대 선수를 발로 밟았다가 퇴장당해 패배의 원흉이 되어 국민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 월드컵이 될 수 있었던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대회 직전 월드컵 출전의 꿈을 접어야했다.

 

 

 

 

베컴은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판타지스타였고, 축구선수로서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린 축복받은 스타였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커리어는 단지 뛰어난

외모나 타고난 조건이 아닌, 화려함 뒤에 감춰진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의 산물이었다.

베컴의 은퇴를 정작 접하자니 매우 큰 허전함이 벌써부터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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