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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울리는음악 2014.06.19 16:56

국악가요의 부흥을 열었던 김영동의 연주곡 '삼포가는길'






국악가요의 부흥을 열었던 김영동의 연주곡 '삼포가는길'

 

 

요즘같은 때 '국악가요'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여전히 이 쟝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다. 나 역시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던 그 시절

대학가에서 한 때 잠시나마 깊이 심취했던 바이지만, 참 오랫동안을 잊고 살아오지 않았나 싶은데

우연한 기회에 국악가요의 시초를 열기도 했던 대금연주가이면서 작곡가였던 김영동의

'삼포가는길'을 들어 보면서야 그 때 그 시절 회상에 잠시 젖어보게 되었다.

 

 

 

 

 

 

 

 

 

국악가요 작곡가 김영동으로 한창 이름을 알리던 그 때가 89년 90년 이무렵으로 기억하는데

'삼포가는길' 외에도 '꽃분네야', '누나의 얼굴', '개구리소리'등 많은 곡들에 한참이나도 심취해 있던

그 때는 요즘처럼 미디어가 넘쳐나고 음악에 있어서도 쟝르가 다양화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모든 부문에서 글로벌화 되지도 않은 때라 그나마 우리 고유의 민족정서, 우리의 소리 이런것들이

온전하게 혹은 새롭게 재창조되며 '국악가요'라는 새로운 쟝르를 개척할 수 있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만큼 지금의 우리는 우리 본래의 것들을 거의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당시만 해도 또래들 사이에서도 국악이나 국악가요 같은 쟝르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이없는 표정을 짓거나 이해가지 않는다며 '애늙은이' 취급을 받기도 했으니 지금인들

그게 그리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을거라 본다. 이건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서양의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면서, 서양의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모두가

우수한 문화인양 받아들이면서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정서,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들에까지 대뜸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것은 그만큼 식민사관에 뼛속까지 길들여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그 말마져도 요즘은 빛이

바래져 가는 세상이다. 그런 말 조차도 일본인들이 만들어낸걸 가져다 우리가 만들어낸 말처럼

예술인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여질 때 조차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고유의 것을 빛의

속도로 잃어가고 있는 것만큼은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니던가 싶다.

 

 

 

 

 

▲ 김영동 삼포가는 길 (TV 문학관 '삼포가는 길' 주제곡)

 

 

 

요즘말로 빠르게 글로벌화에 발맞춘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정체성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고, 또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식민지화 된다는 말이기도 하며 

이를 다시 영어로 말하면 '뉴월드오더(New World Order)'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게다.

그만큼 원래 고유의 문화를 빠른 속도로 상실해 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 김영동.슬기둥 노래집 속의 '누나의 얼굴'

 

 

 

 

▲ 김영동.슬기둥 노래집 속의 '꽃분네야'

 

 

어쨌든 국악가요는 그동안 김영동이라는 독보적인 작곡가와 더불어 한 때나마 소수 매니아

또는 노년층에 제한된 국악의 수용층을 넓히고 국악의 활로를 방송 및 음반, 청소년 음악회 등으로

새롭게 넓히는 등 국악의 대중화 및 현대화라는 1980년대의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 단조·장조 오음음계의 틀에 박힌 선율과 초보적인

3화음, 유절형식의 서정가요라는 초기의 정형화 된 틀에서 진화하지 못하고 가사에 있어서도
토속적이고 감상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킴으로써 이후 시대 변화에 맞추어 자생적으로

변신하지 못했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국악가요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민요풍의 대중가요였던 신민요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신민요는 특정 작곡, 작사자에 의해 짧은 유절 형식의 민요풍 가요로 만들어져 양악과 국악

혼합합주에 의해 반주되면서 대중들에게 현대적인 민요로 유행되었으며, 국악가요는

1970년대 후반 국악계 안팎에서 소규모 형태의 양악 및 국악 혼성 실내악단에 의해 반주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로서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는 퓨전국악의 대중화로 인하여 그 하위 갈래로서 민요의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자리잡았으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쇠퇴일로를 걷게 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작곡가 김영동은 국악가요를 연 초기 작곡가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78년 12월

국립극장에서 발표된 '누나의 얼굴', '개구리 소리' 등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 혹은

민중가요의 영향을 받은 노래로서 민요풍의 운동가요로 유행되었고 영화주제가 '조각배',

'어디로 갈꺼나', 연극 삽입가요 '사랑가', '한네의 이별', 그리고 TV문학관 주제가였던

'삼포 가는길' 등이 국악가요의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시그널 뮤직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김영동의 '초원'(1983)

 

 

 

김영동의 작업을 이어받아 국악가요가 국악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정착하게 된 데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 활동의 힘이 확실히 컸다. 가야금, 피리, 기타, 해금, 소금, 신디사이저 등 당시

새로운 양악과 국악 혼성 편성으로 구성된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은 1990년대 초반까지 김영동, 채치성,

조광재 등의 창작곡을 연주하면서 방송프로그램 출연과 음반작업, 라이브 공연을 통해 국악계에

'국악의 대중화', 혹은 '생활화'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슬기둥의 대표곡으로는 '꽃분네야', '산도깨비', '소금장수', '황톳길' 등이 있다.

초창기 국악가요는 대편성 기악음악위주의 창작국악과 달리 짧고 단순하여 따라 부르기 쉬운

동요나 민요풍 노래 위주로 되어 있고 대금, 가야금 등의 전통선율악기와 기타 및 

서양화성악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밴드의 반주를 포함하였다.

 

 

 

 

 

 

 

 

국악가요의 이러한 반주 편성은 이후 퓨전국악 밴드의 모체가 되었다. 국악가요는

음악회장외에 방송 및 음반과 같은 대중매체에 대한 친화력이 강하고 주요 수용층으로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당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국악가요가 대중화되면서 국악관현악단에서 국악가요 공연을 주최하는 등 국악계 제도권에

진입하여 대편성 국악관현악단에서도 국악가요를 수용하였다.

 

 

 

 

 

 

 

김영동
대금연주가
출생:1951년 1월 29일(충청남도 홍성)
학력:서울대학교 대금 학사
수상:1994년 제39회 아태영화제 최우수음악상
경력:2005 경기도립국악단 예술감독
1993~1999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1990~1992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1979~1981 국립국악원 연주단원

 

 

 

 

 

 

 

 

 


인물(People)/유명인사 2014.03.22 21:58

태평소에 심취해 한국인이 되어 살다간 원로 국악인 해의만(海義滿) 씨






태평소에 심취해 한국인이 되어 살다간 원로 국악인 해의만(海義滿)

 

 

원로 국악인 '해의만(海義滿)'씨가 지난 3월1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한국전쟁 당시 어둠속에서 들려오던 태평소 소리에 심취해 태평양 건너 동방의

이 작은 나라에까지 찾아와 귀화해 한평생을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전통 국악의 발전과

보급에 힘쓰다 간 이 독특한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진작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얼마전 타계한

원로 국악인 해의만 씨의 이야기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할까 한다.

 

 

 

 

 

 

 

 

 

'국악(國樂)'이란 요즘 세대뿐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에 살고있는 우리의

전통음악임에도 한참을 외면 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계화 열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워낙에 거의 대부분의 대중매체들이 우리의 것을 등한시 하며 돈 되는,

이른바 잘 나가는 음악들만을 선호하다 보니 어쩌면 어릴적부터 아이들이 

서양음악에 쉽게 빠져들게 되는 일이 전혀 이상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어린 세대가 '요즘의 주류 음악들'에 쉽고 빠르게 동화되는 만큼,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것에 대한 소중함과 의미를 제대로 알고 난 뒤에 그리한다면

이 또한 전혀 문제될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교육 현실 자체가 그렇게 밖에

안되다 보니 어느새 등한시 하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심지어 어디가서 국악을

좋아한다라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손가락질 받기 쉬운게 현실 아니던가.

한국 사람이 한국 전통음악 좋아한다는 자체가 이 정도 상황까지 와있다.

 

 

 

 

 

 

 

 

요즘 광고에 잘 나오는 국악신동 '송소희'가 그래서 더 이뻐보이는 이유도

다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누구나 못해서 안달이 난 각종 오디션 프로에서 기교는

있을지언정 그들이 그렇게 혼신을 다해 부르는 노래와 제스쳐들이 나에게는 일말의 감흥이

전혀 와닿질 않는 이유 역시 머릿 속 생각이 이처럼 노인네 사고여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입바른 소리는 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얼마전 타계한 푸른 눈의 원로 국악인이었던

 해의만 씨가 우리의 전통음악 '국악'의 세계화에 한평생을 이바지하던 중에 노환으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순간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자국민들(특히 젊은이들)도 국악을 오히려 창피해 하며 누구도 쉽게 이를 연구하거나

배워보려 하지도 않는 판에 푸른 눈의 이방인이 한국인을 대신해 국악을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했고 평생을 국악사랑과 연구발전에 이바지하며 살다 갔다는

이야기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타계한 원로 국악인 해의만 씨의 본명은 미국명으로 앨런 헤이먼

(Alen Heyman)으로 뉴욕 태생의 이른바 '뉴요커'였다. 그런 해의만 씨가

한국을 알게된건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1953년 위생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들었던 태평소 소리(아마도 북한군 진영에서 들려오던)에 감명을 받았던게

한국과의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4년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해의만 씨는 한국 유학생과 교류하며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으며, 급기야 1960년 그토록 오고싶던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원래 진작

오고 싶었으나 당시만 해도 민간인 신분으로 이 낯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 

입국허가가 쉽게 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안된 분단국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다시 오게된 해의만 씨는 한국국악예술학교에 들어가 

국악을 배우는 동시에 전통 음악과 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한국삼천리가무단'이 1964년 미국 27개 대학과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73년 국립국악원 연주단과 함께 이란, 프랑스, 서독 등에서

공연과 함께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건 1995년. 미국식 이름 

'앨런 헤이먼'에서 해의만(海義滿)으로 바꾼 것인데 서울 해씨의 시조라고 한다.

'해의만'이란 이름을 쓰게 된건 1960년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오던 길에 만난

선교사를 통해 한국식 이름으로 바다 '해(海)'자에 '옳은 일로 가득

차라'는 의미에서 '의만(義滿)'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 2008년 캐나다 퀘백에서 있었던 세계군악대회에서 '태평소'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어쨌든 해의만 씨는 그렇게 팔자 없었을 지도 모를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역 땅과 인연을 맺었다. 총성이 오가는 전쟁통에 우연히 들었던 태평소 소리가

그의 영혼을 뒤흔들었던게 분명하다. 훗날 모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국의 전통음악인 국악이 왜 좋은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음악은 아주 즉흥적이면서도 기쁨과 슬픔 등 인생의 혼이 담겨 있어요.

서양음악은 4분의3박자인 경우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똑같이 반복되지만, 한국의

민속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반복 없이 진행됩니다. 넓은

사상이 있어요. 각 지역의 서민들의 삶이 담겨 있지요."라고 말이다.

 

 

 

 

 

 

 

해의만 씨는 그렇게 한국인들도 구닥다리라며 외면하던 전통음악에 대해

수십 년간 국악 자료 수집에 몰두하며 공을 들이는 삶을 살았다. 2010년 '서애악부',

'정축진찬의궤', '설중회춘곡' 등의 악서와 고서, 1960년대 국악 연주 녹음 자료 등

희귀 자료 60점을 국립국악원에 기증하기도 했으며, '삼천리 나라의 무용'(1964),

'한국판소리해설'(1972) 등 저서 5권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국악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국제문화협회 문화상(1982),

한국 유네스코위원회 문화상(1991), 국무총리 표창(1995), 은관문화훈장(2011)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옥자 여사와 아들 성광(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

선주(개인사업), 딸 람(캐나다 요크대 교수)씨가 있다.

 

 

 

 

 

 

이제 故人이 된 해의만씨에게 한국인들도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

한 국악을 사랑하고 아끼고 발전 및 전파하는데 한 평생을 바친데 대해

국악계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깊이 머리숙여 감사한다.

 

 

 

 

 

 

 

 

 

해의만
국악학자
출생:1931년(미국)
사망:2014년 3월 1일
수상:2011년 은관문화훈장
1995년 국무총리 표창
1991년 한국유네스코위원회 문화상
1982년 한국국제문화협회 문화상

 

 

[참고자료]-[김문이 만난사람] ‘푸른 눈’ 원로 국악학자 해의만의 국악사랑 50년(2012.8.2)

 

 

 

 

 


  • Favicon of https://mbk4141.tistory.com 순간을소중히! 2014.03.23 16:4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좋은 글이고 의미있는 글입니다. 저또한 우리의 것들을 등한시한채 살아 가고 있지만 많은 분들이 보고 잠시라도 우리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 Favicon of https://speciallotto.tistory.com 사색하는남자 스페샬로또 2014.03.23 17:14 신고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물론 저도 레게뮤직 뿐 아니라 힙합까지 고르게 좋아하는 잡식성입니다만, 우리것을 알고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것과 전혀 모르고 좋아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요즘 세태가 우리 것이란 곧 촌스럽거나 낙후한 것처럼 여겨지는게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오디션프로 하는 것보다 송소희양과 같은 경우가 몇십배는 훨씬 더 이쁘고 기특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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