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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때리는영화/史劇으로보는 역사 2014.03.06 21:23

영화 '취화선' 속의 장승업과 갑오 동학혁명, 격동의 조선말 천재화가의 생애






영화 '취화선' 속의 장승업과 갑오 동학혁명,

격동의 조선말 천재화가의 생애

 

 

'취화선'은 2002년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어느덧

10년을 넘긴 영화가 되었는데, 이 영화는 격동의 조선말을 살다간 천재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로 개봉당시 썰렁한 극장에서 혼자 본 영화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미술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던지라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꼭 보아야 하는 영화였지만, 당시 모처의 CGV개봉관

안이 그토록 썰렁할 줄은 몰랐다. 역시도 임권택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낭보를 전해오고서

그제서야 극장으로 달려가는 한국이란 나라의 대중들 뒷북은 알아주어야 한다.

 

 

 

 

 

 

 

 

취화선 영화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갑오 동학혁명일 것이다.

그리고 올해 2014년은 120년만에 다시 돌아 온 갑오년이다. 즉, 지금으로부터 120년전 그 때에

천재화가 장승업은 소용돌이 치는 조선말의 역사를 처절하게 살다간 산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을 그렇게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로 최민식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야~이 개자식들아~~!!"라고 외치던 그 목소리에는 당시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양반사회의 위선과 더불어 국운이 급속히 쇄락하는 그 시절에 태어난 천재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난 때는 1894년, 고종31년이었다. 이듬해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게 1895년의 일인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 사이

에서는 아직도 '명성왕후'라 칭해야 한다는 쪽과 그저 나라를 망친 '민비'일 뿐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며 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적 정립이 바로 세워지지 않았다. 하물며 일본을 향해

당당하게 사과를 얻어내기나 했겠는가. 여전히 민비를 직접 죽이는데 사용된 닛뽄도가

일본 어디에 당당히 모셔져 있다고 하는데도 그에 대한 명명백백을 가리려고 힘을 제대로

써보기나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 칼에는 '여우사냥'이란 글귀가 써있다고 한다.

 

 

 

 

 

▲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의 민비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그냥 '민비'라고 부른다. 국모로서 일본 낭인에게

참살 당하는 치욕은 참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진짜로 나라를 망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심지어 뮤지컬을 통해 민비에 대한 미화는 수도 없이 이루어졌다.

그게 민씨 문중의 노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미화시키는 자체부터가 그릇되었다고 본다. 민비가 한 일은 잘라 말해 열강들로 하여금

대놓고 조선을 유린하라고 대문을 활짝 열어준 일 밖에 없다고 평가절하할 뿐이다.

 

 

 

 

 

 

 

 

 

 

영화 취화선 속에도 잠깐 나오지만, 때는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난 시기였고

이에 당황한 조선의 왕족과 양반들은 모의 끝에 청나라 군과 일본군을 차례로 끌어들여

역사상 최초로 성공할 수도 있던 민중봉기 동학혁명을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기껏해야 농기구와

죽창을 들고 전국 단위로 떨쳐일어선 농민들이 우금치(충남 공주)에서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에

거의 양민학살 수준으로 죽어나갔다. 우리가 일제시대의 일본만행을 규탄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왕권을 위협하는 농민군이 반란군이라고 뒤짚어 씌워서 그렇지 일본인 혹은 중국인과 같이

타민족에 의해 일방적으로 살해당한건 동학혁명이 더 앞서 일어난 일이다.

 

 

 

 

 

▲ 취화선 예고편(해외버전),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흔히 이라크전에서 1년간 2십만명인가가 죽었다고 하는데 동학혁명은 1년동안

약 4십만명의 조선 백성이 죽었다. 일본군의 무차별 기총소사에 수만명이 그자리에서 쓰러져

죽는다고 상상해 보라. 살아서 도망치던 것까지 끝끈태 뒤를 쫒아 죽이는 장면은 영화 취화선에서

후반부에 장승업이 늙어 추운 어느날 들녘을 걸어가는데서 그대로 살상장면이 펼쳐진다.

10대시절 종로 인사동 어드메에서 외국의 고서적을 둘러보던중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당시의

놀라운 사진들이 적나라하게 찍힌 책자를 얼핏 본적이 있었다.

 

 

 

 

 

 

 

만일 당시 갑오 동학혁명이 성공했더라면, 우리가 그렇게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는 

프랑스혁명에 이어 인류사에 있어 기록할만한 혁명이 일어난 셈이다. 썩어빠진 봉건왕조를

무너뜨리고 지독한 신분제에 의해 착취 당하는 민중이 스스로 봉기에 일궈낸 혁명이

될 뻔 했고, 심지어 러시아 혁명 보다 앞서 일어난 혁명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 "Chihwaseon" (drunk on women and poetry)

 

 

 

또한 동학사상이 만천하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민비는

일본군 청나라군을 닥치는대로 끌어들여 제나라 백성을 마구잡이로 죽이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본에게 본인도 살해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거듭 일어난 것이다. 아마도

영화 취화선을 보신 분들은 이런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들 알고 보셨을까? 나는 영화 취화선을

보면서 천재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보는 것도 좋았지만, 임권택 감독에 의해 고증을

거치며 그려지는 이러한 시대상을 낱낱이 목격하는 데에도 의미를 두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화가 장승업! 장승업의 여자 '매향'역에 배우 유호정이

나오지만, 매향은 조선말 천주교 신자였다. 취화선에 나오는 장면 중 연이은 천주교 박해

장면도 역사를 모르고 보는 분들은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장승업이 태어난 연도로 추정해

보면 그 장면은 '신유박해'나 '기해박해'도 아니었떤 것 같다.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 되었을 것이고 영화적 설정이 아니었나 짐작해 볼 뿐이다.

 

 

 

 

 

 

 

 

 

영화 취화선에서 그려지는 갑오 동학혁명의 장면들은 결연함을 넘어 안타까움으로

이어진다. 그를 뒤에서 밀어주고 오원(吾園)이라는 호까지 지어주며 개화사상에 운명을 던져야 했던

양반 김병문(안성기 분)의 모습도 숙연한 느낌마져 든다. 갯벌에서 노년에 겨우 만나 서로 부등켜 안고

웃기만 하던 그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임권택 감독 특유의 연출과 정일성 촬영감독이담아내는

조선 팔도 산하의 아름다운 정취 또한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백미로 다가온다. 당시 장승업의

그림 그리는 장면을 대역한 사람은 중앙대학교 김선두 교수로 기억한다.

 

 

 

 

 

 

 

 

 

영화 취화선을 보면서 구지 120년 전 갑오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그저 영화로만 바라보아도 상관은 없겠지만, 역사적 사실과 시대상황을 제대로 알고

영화를 감상한다면 그 느낌은 다르게 다가올 줄로 안다. 그리고 장승업 역의 최민식 씨는

이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는 했지만, 이 영화 '취화선'에서 그가

내뱉는 거의 모든 대사는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리도 어록을 적어두어야 할 수준인지 모르겠다.

참고로 조선시대 천재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다룬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의

시나리오는 그 유명한 도올 김용옥 교수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취화선'을 못보신 분들은 아래에 가셔서 유튜브로 감상하실 수 있다.

화질은 크게 기대할만 하지 않지만 보시는데 지장은 없다.

 

 

 

▶ 유튜브 '취화선' 감상하기

 

 

 

 

 

 

 

 

 

 

 

 

취화선

醉畵仙, Chihwaseon, 2002

한국
120분
개봉:2002년5월10일

감독:임권택

최민식(장승업),유호정(매향),안성기(김병문),

김여진(진홍),손예진(소운).정태우(어린 승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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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때리는영화/史劇으로보는 역사 2014.02.02 18:15

영화로 보는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삼전도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배경






영화로 보는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삼전도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배경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조선역사에 있어 세번에 이어지는 반정 중에서도 가장 명분이 약했던

정변으로 기록되어 있다. 잘못된 왕과 정치를 바로 잡는다 하여 일어났던 이 '반정(反正)'은 조선역사상

세번에 걸쳐 일어났는데, 오늘은 바로 이 역사 속 반정의 주인공 중에서도 가장 자격 없는 임금이었던 인조와

더불어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겪어야 했던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살펴보고 이런 '반정'과

관련한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인조와 삼배구고두례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을 하게 된건,

이번 설날 장인 어른께서 세배하는 자세(사실 올바른 세배자세를 어디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를

두고 덕담을 하시는 과정에서 인조와 삼배구고두례 이야기가 나오면서였다.

 

 

 

 

 

 

 

우선, 조선 역사에 있어 세번의 반정 중 첫번째 반정을 일으킨 주인공은 세조(世祖)'였다.

어린 단종을 몰아낸 세조의 반정이 그 첫번째 사건인데, 2013년 개봉했던 송강호 주연의 영화 '관상'에서

배우 이정재를 통해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피의 군주 세조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세조는 반정의 명분이랄

것도 없이 형 문종의 어린 아들이자 조카였던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수양대군이었으며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의 차남이었다. 그런 잔인한 세조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영화 '관상'에 담겨있다.

그리고 이어 두번째 반정인 '중종반정'은 천만관객으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 '왕의 남자'에서 등장한다. 

바로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이다. 극 후반에 궁궐로 난입하는 무장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 '왕의남자' 에서의 연산군을 폐외시킨 반정이 '중종반정'이다.

 

 

중종반정은 폐악을 일삼던 연산군을 몰아내고자 반정의 명분을 내세웠던 정변으로 그나마

가장 명분이 있다 할 수 있으며, 반정으로 인해 연산군을 폐위시킨 진성대군은 이 사건 직후 왕으로 추대되어

훗날 중종이 되었다. 즉, 자신이 처음부터 왕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반정을 도모한 것은 아니란 이야기이다.

헌데, 마지막 세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의 주인공인 인조(仁祖)는 달랐다. 반정의 명분이 약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선조 때부터 광해군을 향해 마음 속에 담아 온 복수의 감정과 더불어 왕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반정을 도모했으니

시작부터가 앞으로 두 반정과는 많이 달랐다. 명청 교체기에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저울질을 하며 나름대로

현명한 치적을 보였던 광해군과 달리 인조는 새롭게 떠오르는 제국 '후금'을 오랑캐라며 개무시했다가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연이어 두번이나 겪으며 끝내 굴욕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겪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굴욕을 당한 임금이 되었다. 하지만, 이 말로 다 표현 못할 병신같은 왕이 당한 굴욕이

백성이 당한 굴욕에 비하기나 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조선역대 임금중에 제일 못나고 비열한, 욕나오는

임금을 꼽으라 할 때 두 명의 임금인 '선조'와 '인조' 특히 인조를 일순위로 꼽는다. 

 

 

 

 

 

 

▲ 영화 '청풍명월'에서 인조반정을 보여주는 한 장면, 잔인한 인조는 그렇게 광해군을 몰아내었다.

 

 

 

바로 이런 인조반정의 주인공 인조에 대한 언급이나 관련이 있는 영화를 꼽으라면 2003년 조재현,

최민수 주연의 영화 '청풍명월'을 꼽을 수 있겠다. 인조반정으로 피바다가 되는 궁궐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준

영화로 기억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화는 이병헌 주연의 천만관객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에서는

인조반정으로 폐위 당하기 전의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있다. 지금에 와서 역사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광해군은 사실 반정의 명분이 너무나 빈약했던 인조반정에 의해 희생된 사례라고 보는게 옳을 듯하다.

픽션이기는 하지만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에서도 이런 정적들에 의한 압박과 음해의 위협 때문에 가짜 왕

노릇을 필요로 해야했던 그런 상황이 잘 그려지고 있지 않나 싶다. 결국 폐위된 광해군은 유배를 가긴 했어도

천수를 누리며 인조의 온갖 악행과 국난을 경험해야 했으니 그 속마음이 어찌했을지 궁금하다.

 

 

 

 

 

▲ 인조에 의해 폐위된 비운의 왕 '광해', 이병헌에 의해 정적들에 대해 고민하는 광해군의 모습이 잘 보여졌다.

 

 

 

청나라(후금)에 의해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겪게 된 인조. 어질 '인(仁)'자를 써서

'인조'라 부르고 있지만, 그가 행한 악행으로 보자면 '잔인하다' 할 때의 '인(忍)'자를 쓰는게 맞을지도 모른다.

후금. 즉 청나라에 당한 이 두번의 국란(國亂)은 박해일,류승룡 주연의 영화 '최종병기 활'을 통해 어느 정도

그 참담함을 잘 보여주었는데, 실제로는 각종 문헌에 나와있는 기록들로만 보아도 당시 조선이 청나라에 짓밟힌

정도가 임진왜란 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종병기 활'에서도 보여지고 있지만 당시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

숫자만 60만명에 달한다. 개 끌듯 올가미 줄로 엮어 잡아다가 국경을 넘어 멀리 타국인 청나라로 끌려간

백성의 숫자가 그 정도면 이건 거의 나라가 거덜난 셈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임진왜란을 겪은지 불과 38년만에

재차 이런 일을 겪어야 했으니 그 때 당시 이미 조선은 망한 바나 다름없었을 것을 5백년이나 이어갔다는게

신통할 지경이다. 중국의 역사만 보아도 잘 나가는 왕조가 들어서봐야 불과 2~3백년이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로 머리를 짖찧었던 사건도 치욕적이라지만, 사욕과

사적인 감정에 휩쌓여 명분 없는 반정으로 왕이 된, 못난 임금 '인조' 하나 때문에 백성들이 겪은 고초는 그와는

견줄바가 못될 정도로 참혹함의 극치였다. 대부분 노예로 팔려갔을 텐데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생활력 강한

여인네들은 모두 '화냥년'이라 손가락질이나 했으니, 인조라는 왕이 얼마나 비열하며 능력없고 상황판단 안되는

못난 임금이었는지 대략 짐작이 가실게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남한산성은 청과의 전투랄만한 것도 없이

그저 '인조'라는 못난 임금 하나 건사시켜 보자고 버티고 버티었던 그런 장소였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더니 변하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청으로부터 삼배구고두례 같은 치욕을 겪기까지 버티던 남한산성은 이제 수도권 인근에서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 중에 하나가 되었다. 차를 타고 남한산성 주변을 돌면 산세나 지형만큼은 인조가 한동안 버틸 수 있던

요새 역활을 톡톡히 해주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한반도에 있어 가장 최적의 요새라 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강화도 뿐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으로 유명한 몽고항쟁 당시 몽골의 침략에 굳건히

맞설 수 있었던 이 천혜의요새 강화도 마져도 얼마나 어처구니 없이 함락당했는지 모른다. 2012년

MBC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무신'을 보면 최우와 강화도 항쟁의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는데, 어쨌든

이 강화도를 김경징이란 졸렬한 인물 하나 때문에 어이없이 함락당하고 인조가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남한산성 뿐이었다. 제대로 된 싸움 한번 못하고 처음부터 '기방'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어이없이 함락당하던 때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강화도에 난입한 청군이

강화도를 얼마나 쑥대밭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젖먹이 아이 뿐 아니라 여자들은 물론이고 양반 상놈할 것

없이 초토화시켜 버렸다. 얼마나 파죽지세로 청나라가 위세를 떨쳤던지 인조라는 임금이 제 몸 하나 건사하겠다고

허둥대는 동안 전국은 청의 말발굽 아래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짓밟혔고 인조가 갈 수 있는 곳은 그렇게

남한산성 뿐이었으며, 이 마져도 혀 깨물고 죽지 못해 청 태종 앞에 나아가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의 항복식을 거행하기에 이른다. 그것도 저 높이 계단 위에 앉아있는 청태종의 귀에 소리가

잘 안들린다하여 이마가 깨지고 피가 철철 흐르도록 연신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역사에 있어 이렇게 참혹한 순간이 있었을까? 권세란 약한 백성들 앞에서 떵떵거리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힘 없는 약한 백성을 외세로부터 지켜낼 때 빛이 난다는 것을 내 알바 아니라며 왕노릇 하던 자들에

의해 그렇게 철저히 짓밟히던 시절이 어디 이 때 뿐이었을까. 인조 다음으로 욕 먹는 임금 선조 역시도

그런 비판들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임금이었다. 인조 처럼 적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 삼배구고두례를

겪지는 않았지만, 일찌감치부터 왜구의 침략기미를 아뢰는 충신들의 말을 무시하다가 결국 침략을 받자

제일 먼저 보따리 싸들고 도망치는 졸렬함을 보인 바 있다. 게다가 이를 극적으로 막아내는 민족의 영웅이신

성웅 이순신을 시기하고 깎아내리며 끝까지 경계하던 그런 못난 임금이란 자가 어찌 오늘날 칭송받는

임금으로 대접이나 받겠나 싶다. 역적이 따로 없는 밥값 못하던 왕들은 조선시대 내내 있어왔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란 말도 요즘에 와서는 '조일전쟁(趙日戰爭)'이라고 고쳐불러야 할 정도로

역사를 임의적으로 축소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하는데, 사실 임진왜란은 어쩌면 성웅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위인이 있어 초기엔 일방적으로 당해도 후에 왜군을 몰아냈기 때문에 그 규모나 기간으로만 보아도 일개 난(亂)이

아닌 전쟁으로 보는게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임진왜란 때도 온 국토가 왜놈들에게 유린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과 30여년 만에 또다시 청나라로부터 이런 역사에 씻지 못할 오욕을 남긴 인조는

차마 왕다운 왕이라 할 수 없겠다.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겪고나서도 한 인간으로 보았을 때 어찌나 속 좁고

비루했던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비였던 강씨에게 마져

사약을 내리는 이 극악무도한 임금 인조. 그의 묘호는 어질 '인(仁)'자의 인조(仁祖)라 할게 아니라

'잔인하다'할 때의 '忍'자를 써서 '忍祖'라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

 

 

 

 

▲ 인조의 무덤이다. 파주 장릉(長陵).

 

 

 

경기 김포에 가면 장릉(章陵)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인조가 조선왕조계보에도 없는

'원종(元宗)'이란 묘호를 붙여 만든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경기

파주에도 '장릉(長陵)'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인조가 묻힌 릉이라고 한다. 장릉이란 묘 이름은 사실

여러곳에 쓰이고 있는데, 단종의 능 역시 장릉이다. 어쨌든, 인조가 묻힌 파주의 장릉은 1970년

무렵부터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하는데 짐작엔 아마도 문중에서 이런 눈꼴 사나운 역사속 임금의

묘가 계속 원망과 지탄이 대상인지라 훼손을 염려해 출입을 제한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실제로도 문화제를 훼손하는 사례는 왕왕 일어나기 때문이다.

 

 

 

 

 

 

 

 

 

▲ 청나라 태종이 세웠다하는 '삼전도비(三田渡碑)'

 

 

그리고 청태종이 세웠다는 삼전도에서의 삼배구고두례를 기념비(삼전도비)는 최근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이 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 비석은 원래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쓰여 있어 청나라의 태종이 손수 조선에 병사를 이끌고 내려와 인조로부터 삼배구고두례를 받으며

항복을 받고 회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에 치욕의 역사를 담았다 해서 1895년 고종의 명으로

땅에 묻혔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세워졌다. 그러던 것이 다시 또 한번 치욕의 역사를 상기시킨다하여

광복 후 다시 땅속에 묻혔다가 1963년 홍수로 모습이 드러났고 석촌동 내에서도 2~3차례 이전을 거듭해

왔다. 2007년에는 붉은 페인트로 훼손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는데, 이제 다시 문화재청에 의해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1639년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했던 장소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현재 CCTV 등까지 갖춰 이곳을 역사교육의 현장이자 명소로 활용하고 있다. 결국

인조가 남긴 것은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남긴 삼전도비 뿐인 셈이다.

 

 

 

 

 

 

 

 

 

 

고종이 그러했듯 감춘다고 해서 사라질 역사가 아니다. 감출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치부를

떳떳이 드러내 후세에 알려야 다시는 이와같은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엄중한 역사적

사실을 명심하고 무능한 왕과 정부가 들어서면 국가가 어디까지 망가지며 바닥을 치게 되는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일개 왕족의 부끄러움이나 높으신 님네들의 창피한 일이라 하여 가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치욕적인 역사라 해도 역사란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억해야 하고 반복되는게 역사인지라 오늘날 처럼

일부 세력에 의해 왜곡까지 서슴치 않는 소홀한 역사교육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줄로 안다.

고작 이백여년 밖에 안된 미국이란 나라의 고등학교 역사수업 시간은 우리보다 몇배는 더 많다는 사실

조차 요즘 엄마들은 모른다. 영어교육에 목을 메며 말로만 반만년 유구한 역사라 할 게 아니라 역사교육의

중요성 부터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극동아시아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통하는 대한민국은

앞으로 훗날 미국과 중국의 대립 그리고 일본의 한반도 재진출의 야욕 등 수많은 외세의 간섭과 압력 앞에

가로놓일게 뻔하다. 더불어 남북한 대립은 이런 와중에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어떤 불똥이 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저들은 서로 이 땅의 배경과 상황을 이용하려 들 것이 자명하다. 역사적 전례를

바로 알고 과연 어떤 선택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고 민족의 중흥에 올바른 선택일지를 국가는

잘 판단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글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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