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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는 세상사/핫이슈.특종 2014.08.16 23:50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으로 되돌아 보는 한반도에서의 천주교 박해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으로 되돌아 보는 한반도에서의 천주교 박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여 시복식을 가졌고 광복절 이듬해인

16일 오늘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집전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가

세계적으로 주목 받았다고 한다. 미국 AP 통신은 수십만 명의 인파가 광화문광장에서

교황을 맞이한 이번 행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선교사가

통하지 않은 독특한 한국의 가톨릭 역사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평소 조선의 역사에 관심이 맣은 바 천주교 박해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조선후기 정조 치세 15년에 최초의 박해(신해박해)가 발생한 이래

3번의 박해가 더 있었다. 정조는 개혁군주 답게 비교적 이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 조선은 유교국가로서 국가의 기틀마져 흔들 수 있는 못된 사상이라 하여

정조시대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 이후 정조가 죽고나자 천주교는 본격적으로 극심한 배척을

당하게 된다. 특히나 당파싸움 때마다 정치적 이해관계의 불똥은 언제나

천주교 박해 쪽으로 튀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기에 당파간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얽히면서 조선의 종교탄압이란

아마도 전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탄압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민족이 장점도 많다고 하지만, (약자 앞에)잔인하고 무자비하기로는 두손 두팔 다 들고 혀를

내둘러야 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전 세계 여러

수많은 나라들이 많은데도 어째서 로마의 카톨릭은 한국의 천주교에 그토록 관심을 많이 보이는지

말이다.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그마만큼 이 땅에서 흘린 피가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조선왕조에서 벌어졌던 이와같은 일들은 은연중에 터부시 되는 경향도 없잖아 있지만,

참 남 욕할 것 하나 없는 그런 나라였다는 생각이 든다.

 

 

 

 

 

 

▲ 조선 최초의 김대건 신부.

헌종 2년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에게 영세를

받았다고 한다. 세례명은 앙드레이다.

 

 

 

우리가 인권 이야기하면 북한을 자주 거론하는데 폐쇄적인 조선왕조 하에서의

천주교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대표적인 4대 박해 기간 동안 희생된 이들이

얼마나 될까. 조선에서 일어난 4대 박해 중 대원군 시절 가장 마지막에 일어난 병인박해 당시만

 하더라도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참형 당하고 국내 신도  8000여명이 학살되었다.

불과 수개월만에 이 정도를 죽일 정도면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를 놓고 보았을 때 엄청나게

끔찍한 일이 된다. 그렇잖아도 민비는 동학혁명으로 40만 인가를 죽였는데 거참

이 대목에서 조선이란 나라의 아름답지 못한 실체가 드러난다. 오로지 왕조와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마찬가지다. 별반 다를게 없다.

 

 

 

 

 

 

 

 

 

 

어쨌든,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다녀가면서 시복식을 하고

시복미사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고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위로했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사 강론을 통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성장했지만,

경제의 불평등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양 선교사에 의해

자리잡지 않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독특하다고도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어째서

한국은 그들이 보았을 때 그토록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엄청난 규모의

천주교 박해가 이 땅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본다.

 

 

 

 

 

 

 

 

 

 

 

한줌 권력을 쥔 무리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성을 핍박하며 그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권력을 지켜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왜 백성들이 제나라 임금

섬기기를 놔두고, 유교를 버리고 새로운 사상에 그렇게 관심을 보일 수 밖에 없었는지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역사공부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즈음하여 이 땅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기까지 당시 그들이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벌였던 만행들을 한번 되돌아 보았으면 한다. 조선 후기를 피로 물들였던 4대 박해를 소개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 썩 자랑스럽지만도 못한 것이, 이 땅에서는 왕권(권력)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탄압과 공포정치도 마다않고 부지기수로 있어왔다.

그렇게 약자 앞에서는 한 없이 강한척 하며 칼을 휘두르는 그런 나라였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해보시기 바란다.

 

 

 

 

 

▲ 영화 '미션' ost. The Mission Theme - Gabriel's Oboe (Ennio Morricone)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

신해사옥·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한다. 가톨릭교가 해서(海西)·관동(關東)

지방의 민중 사이에 신봉되고 있는 동안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1791년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의 선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윤치중의 外弟)이 윤지충의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들어오자, 권상연 등이 호남 출신이라는 데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조정에서는

진산군수(珍山郡守) 신사원(申史源)을 시켜 두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그들이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에 처했다.
정조는 이 사건을 이 정도에서 끝내고 관대한 정책을 써서, 가톨릭교의 교주(敎主)로
지목받은 권일신(權日身)을 유배(流配)시키는 것으로 그치고 더 이상
가톨릭교도에 대한 박해를 확대시키지 않았다.

 

 

 

신유박해(辛酉迫害)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기해박해(己亥迫害)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

(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金逌根)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으로부터 그 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이어 사헌부집의 정기화(鄭琦和)도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南明赫),

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병인박해(丙寅迫害)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

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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