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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4.07.03 21:37

호나우드, 포루투칼 호날두와는 비교할 수 없는 21세기 최고의 사커






호나우드, 포루투칼 호날두와는 비교할 수 없는 21세기 최고의 사커

 

 

 

90년대는 축구사에 있어 그야말로 호나우드의 시대였다.

21세기에 다시 없을 최고의 스트라이커, 최고의 사커로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버린 그는

은퇴 이후 어느덧 많은 이들의 기억으로부터 점차 멀어져갔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를 같은 이름의

젊은 포루투칼 축구선수가 대신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브라질의 호나우드와는 비교조차

안되는 애송이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런데 불명예스럽게도 하필 이름이 'Ronaldo'로 스펠링 조차

같다. 발음까지 같아야겠지만 엄밀히 구분짓자면 브라질의 축구스타는 '호나우드, 포루투칼

축구스타는 '호날두'라고 구분지어 발음해주는게 그나마 정확한 표현이라고 한다.

 

 

 

 

 

 

 

 

 

현재 2014 브라질 월드컵이 한창 진행중이다. 원조 호나우드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 경기는 7월로 넘어오면서 8강을 모두 결정지었다. 독일,프랑스,벨기에,네델란드,

코스타리카,아르헨티나,콜롬비아 그리고 브라질 8개 국가이다. 포루투칼의 호날두는

진작에 짐싸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 이번 월드컵에서 완전히 맥을 못추더라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솔직히 축구를 잘 모르는 나도 잘생긴 외모 하나로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었다고 해서

유명스타이지 실력으로 말하자면 나머지 유럽의 수많은 축구영웅들과 종이 한장 차이밖에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왕년의 브라질 원조 호나우드랑은 감히 비교조차 안되는

그저 그런 실력임엔 틀림없다.(아니라고 우긴다면 말고...-_-;;)

 

 

 

 

 

 

 

▲ 역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열광하는 것들 보면 백인우월주의 신봉자들 맞다. -_-;;

 

 

 

 

브라질의 원조 호나우드와 현재의 호날두에 대해 방송에서 조차 이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를 계속 범하고 있는데, 사실 '호날두'라고 발음하는게 맞다.

과거 브라질이 포루투칼의 식민지였다지만 'Ronaldo'에 대한 포루투칼식 원어발음은

'호날두'에 가깝고 브라질식 발음으로는 '호나우드'라고 발음하게 된다. 즉, 앞부분 'R'에 대해선

양쪽 국가 모두 'ㅎ'발음에 가깝지만 'L'에 가서는 포루투칼의 경우 그냥 'ㄹ'발음으로 가지만

브라질의 경우 그냥 'ㅜ'발음으로 발음하게 된다. 그래서 브라질식 발음으로는

'호나우드'가 맞고 포루투칼식 발음으로는 '호날두'가 맞게되는 것이다.

 

 

 

 

 

 

 

 

 

 

 

축구를 원래 좋아하는 광팬들이야 진작부터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보면서

호나우드의 존재를 알았겠지만, 내가 이 친구를 알게된건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였다.

당시엔 프랑스를 두고 '아트사커'라고까지 표현하며 지네딘 지단이나 앙리, 프띠 등이 결승전에서

브라질에 호나우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3:0으로 우승을 차지했지만, 토너먼트 내내

사실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선수는 단연 호나우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란한 드리블로 4~5명이 에워싸도 어김없이 돌파해냈고 그 다음엔 폭발적인 스피드로 모든 수비진을

제끼며 골대 앞에서 마지막으로 골키퍼를 농락하기까지 이 신출귀몰하는 귀신같은 축구신동에

놀라지 않을 축구팬들은 없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보아도 환상 그 자체다.

 

 

 

 

 

▲ 호나우드 전성기 때의 베스트장면 모음(1993년~2011)

 

 

 

 

아마 호나우드를 제대로 알아보는 축구팬들이라면 21세기 두번다시 이런 사커는

두번다시 나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입을 모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메시'가 물론 잘한다는건

알지만... 글쎄 그래도 오늘날 수많은 축구스타들의 발재간이나 드리블 기술들을 보노라면

전부 호나우드를 따라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말이다.

 

 

 

 

 

 

 

 

 

 

 

지난 2002년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썼을 때도 브라질에는 호나우드가 있었고

결국 브라질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21세기에 다시 없을 축구천재 호나우드는 이후 연이은

부상으로 은퇴를 하게된다. 아래는 2008년에 올라왔던 기사내용인데 참고로 보시기 바란다.

 세월이 또 그렇게 흘러 수많은 축구선수들이 지금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활약하고는 있으나

12년전 한일 월드컵 당시만큼 엄청난 축구스타들이 필드를 누비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아르헨티나의 메시가 있다고는 해도 브라질 축구천재 호나우드 만한

그런 진짜 축구영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게 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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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기사] 호나우드,무릎부상 선수생활 위기(2008년2월14일.

 

호나우두(32, AC 밀란)가 또 쓰러졌다. 이번에는 선수 생활에 위협을 줄 만한 부상이다.

호나우두는 14일 새벽(한국시간) 스타디오 산 시로에서 열린 07/08 이탈리아 세리에 A 16라운드

리보르노와의 홈 경기에서 교체 투입된지 3분만에 그라운드 위에 눕고 말았다. 후반 14분

호나우두는 오른쪽 측면에서 올라오는 크로스를 따내기 위해 호세 루이스 비디갈과 공중볼 경합을 벌였다.

비디갈은 이 공을 손으로 막아내면서 AC 밀란의 페널티킥이 선언됐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호나우두는 비디갈과 별다른 접촉이 없었음에도 갑자기 비명을 외치면서 쓰러졌고

눈물까지 터트렸다. 이는 마치 8년여 전 라치오와의 코파 이탈리아 경기에서 일어난 일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AC 밀란은 경기가 끝난 뒤 클럽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호나우두의 왼쪽 무릎 슬개건이 완전히

파열됐다"고 발표했다. 호나우두는 지난 1998년과 2000년에도 이와 같은 부상을 당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른쪽 무릎이었고, 이번에는 왼쪽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이 경우 재활 기간만 해도

최소한 9개월은 필요한 만큼 호나우두는 사실상 은퇴 위기에 놓이게 됐다. 안 그래도 호나우두는

이번 시즌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올 여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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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나우드를 회상하는 동영상.

 

 

 

호나우두

(Ronaldo, Ronaldo Luiz Nazario De Lima)
전 축구선수
출생:1976년 9월 22일(브라질)
신체:183cm, 90.5kg
데뷔:1993년 크루제이루 EC 입단
수상:2009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MVP
2002년 발롱도르(Ballon d’Or)상

 

 

 

 


[경력]

 

 

2011.12 브라질 월드컵 홍보대사

2008.12 ~ 2011.02 SC 코린티안스 (브라질)
2007.01 ~ 2008.06 AC 밀란 (이탈리아)
2006 제18회 독일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
2002 제17회 한일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
2002 ~ 2007 레알 마드리드 (스페인)
2000 유엔개발계획 친선대사
1998 제16회 프랑스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
1997 ~ 2002 인터밀란 (이탈리아)
1996 ~ 1997 FC 바르셀로나 (스페인)
1994 ~ 1996 PSV 에인트호벤 (네덜란드)
1994 제15회 미국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
1993 남미축구대회 브라질 국가대표
1993 ~ 1994 크루제이루 EC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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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4.05.23 19:09

노무현 서거5주기, 이승환의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뮤직비디오






노무현 서거5주기, 이승환의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뮤직비디오

 

 

가수 이승환이 노무현 서거5주기를 맞아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라는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원래 이 곡은 지난 3월 말에 발표한 11집 '폴 투 플라이(Fall to fly)'

앨범에 수록된 곡이라고 한다. 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참여한 이 노래의 작사는 도종환 시인이,

작곡에는 이승환과 황성제가 공동으로 맡아 11집 앨범 공개 당시 이승환이 직접 이 노래에

대해 돌아가신 노무현 전대통령을 생각하며 부른 헌정곡이라고 밝혀 큰 화제가 된바 있다.

그리고 오늘은 노무현 서거5주기이다.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 가수 이승환이 공개한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눈길을 끄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뮤직비디오 마지막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다.

故 노무현 전대통령으로 보이는 캐릭터의 뒷모습이 나오는 장면이다. 웹툰작가 강풀이

작화를 맡고 애니메이션 연출은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완성했다고 한다. 노래도 노래지만 이 마지막 대목의 애니메이션 속 밀짚모자에

담배를 피우는 캐릭터의 뒷모습은 누가 보아도 노현 전 대통령이다.

 

 

 

 

 

 

 

 

 

오늘 노무현 서거5주기를 맞아 이승환의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는

바로 이 뮤직비디오는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특히나

이승환의 소속사인 드림팩토리 측에서는 애니메이션의 컨셉을 '아버지의 등'으로

설정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만큼 권위주의를 타파한 대통령, 진정한 서민의 대통령 등으로

화자되는 故 전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지와 상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노무현 서거5주기를 맞이한 오늘,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당신에 대한 그림움이 더더욱 커져만 가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앞서 송강호

주연의 영화 '변호인'이 천만관객을 넘으며 다시금 故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묵직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기도 했지만, 오늘날 역사의 시계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행태가 거듭될수록 많은 사람들은 더더욱 더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상징되는

故 노무현 전대통령을 떠올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 노무현 서거5주기를 맞아 가수 이승환의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뮤직비디오가 봉화마을에서 '노무현 대통령 서거 5주기 공식 추도식'에서 상영되었다.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영상을 통해 이승환의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뮤직비디오를 감상해보시기 바란다.

 

 

 

 

 

▲ 이승환 -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뮤직비디오

 

 

 

그그리고 끝으로 노무현 서거5주기를 맞아 사견을 달자면,

노무현은 100% 자살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무서운 것이다. 자살이라고...? 훗....씁쓸하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탄핵사건도 있었고 반대세력에 연일 이리저리 치이던

노무현을 사실 나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었다. 그의 철학과 신념, 됨됨이야 물론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지나친 자신감과 너무도 낙천적인 대응들에 짜증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를 못잡아먹어 안달나 하던 그 세력들, 눈에 보이던 보이지 않는 세력이던 간에 그들의 실체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노무현은 사라졌다. 제거당한 것이다.

이것이 엄연한 대한민국 정치고 현실이다. 안믿기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주체들의 세상이 되어버린 이 땅에서 참으로 순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같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노무현 서거5주기인 오늘도 세상은 그렇게 웃기게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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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4.04.20 23:08

타이타닉 선장, 캡틴 에드워드 스미스(Captain. Edward Smith) 그리고 개도 먹다버릴 세월호 선장 이준석






타이타닉 선장, 캡틴 에드워드 스미스(Captain. Edward Smith)

그리고 개도 먹다버릴 세월호 선장 이준석

 

 

영화 '타이타닉'을 못 본 사람들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와 운명을 함께 했던 선장의 비장했던 마지막 모습 또한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을 텐데, 오늘은 바로 그 타이타닉호의

선장이었던 에드워드 스미스(Captain. Edward Smith)란 분에 대해 언급할까 한다.

영화에서도 보셨겠지만, 그는 전세계에서 배를 모는 모든 선장들에게 있어

전설이나 다름없는 진정한 캡틴이기 때문이다.

 

 

 

 

 

 

 

 

요즘 진도 여객선 침몰 사건으로 연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구조작업과

관련한 상황이 실시간으로 계속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침몰 당시 제일 먼저

도망쳤던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란 인간에 대한 고찰이 계속되고 있다.

 

 

 

 

 

 

타이타닉 선장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 비루한 인간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식을 줄을 모르는데, 사고 직후 구조자들 틈바구니에 껴서 담요를

몸을 덮은 채 선장이 아닌척 하던 그 알량한 모습까지 영상으로 공개된걸 보는 순간

표현 가능한 모든 욕이 쏟아져 나왔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 저녁 뉴스에서는 해외언론에서 '선장의 명예와 전통을 깨는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는 칼럼내용까지 소개되면서 한 마리의 미꾸라지 같은

인간이 국제적 망신과 함께 국격을 제대로 떨어뜨렸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국적을 떠나 전세계 모든 뱃사람들, 특히 세월호 처럼 관광목적의 쿠르즈를

운행하는 선장들로서는 이 어이없고 납득할 수 없는, 선장이라고 불러줄 수도

없는 한 인간의 비루한 행동에 마찬가지로 분노했을 듯 하다.

 

 

 

 

 

 

 

 

 

그런 그가 영화 '타이타닉'을 보기나 했는지, 영화에서 타이타닉 선장은

 승객의 안전을 위해 배의 안전과 책임을 다하고자 어떻게 행동을 했는지 그는 과연

알기나 할까 궁금하다.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선장은 사건이 발생한

지난 16일 침몰 중인 여객선에서 승무원들과 함께 1호로 탈출해 치료를 받았고,

심지어 병원 온돌 침상에서 젖은 돈을 말리고 있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300명에

달하는 어린 청소년과 승객들이 차가운 물 속에서 가족을 떠올리며

살기위해 발버둥 치는 그 순간에 말이다.

 

 

 

 

 

 

 

 

 

 

 

영국 리치필드에 가면 타이타닉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상 밑에는 이런 말이 써있다고 한다. "영국인 답게 행동하라"(Be British).

평생을 바다에서 배와 함께 인생을 보낸 그가 퇴역을 앞두고 처녀 항해에 나섰던

초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와 함께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며 남긴 말이다.

이 한 마디가 던지는 메세지는 참 우리의 상황과 비교했을 때 감히 비교자체도 못된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은 훗날 감옥에서 뒈지면서 무슨 말을 남길까. 그래도 끝까지 자신은

잘못한게 없다고 할 것인가. 참으로 기가 차서 인간으로서 가져볼 수 있는

이성은 간데 없이 헤아릴 수 없는 쌍욕밖에 안나온다.

 

 

 

 

 

 

 

 

1912년 4월 14일 침몰한 영국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Titanic)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영화에서도 보셨듯이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승객과

함께 했다. 그의 인생 자체가 바다였으며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는 그의 무덤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전세계 항해인들에게 전설이자 배우고 따라야 할 귀감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그래서 영원한 캡틴 에드워드 스미스라 할 수 있다.

 

 

 

 

 

 

 

 

 

 

 

 

저녁 뉴스에서 보니까 해외에서도 세월호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고 사고

규모가 더 크거나 작거나에 상관없이 우리와는 여러모로 다른 그들의 대응요령과

직업윤리의식 그리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선장에 대한 처벌 등이 소개되기도 했는데,

어느 나라의 경우 관제실에서 되돌아 오려는 선장에게 쌍욕까지 해가며 승객을

구하러 되돌아가라 호통치는 장면도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어 세월호 침몰 당시의 교신 내용도

소개되었는데 선장이었던 이준석을 포함해 승무원 대다수가 아마추어였다. 그런 그들에게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의지한 채 바다에 나선것 부터가 잘못이었다.

 

 

 

 

 

 

 

 

 

 

 

 

2012년 1월 이탈리아에서는 호화 유람선이 암초에 부딪혀 좌초되었을 때

프란체스코 세티노 선장의 어이없는 실수로 32명이 숨진 사례가 있다. 무려

4,229명이나 타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었지만 이탈리아 검찰은 배의

책임자였던 프란체스코 선장에게 형량 2,697년을 구형하기도 했다.


우리의 경우는 침몰한 세월호의 선장에게 몇년을 구형해야 납득이 갈까.

타이타닉 선장 처럼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승객구조에

전력을 다했더라만 한국의 에드워드 스미스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지금으로

봐선 실종자 가족과 사망자 가족들의 끓어오르는 분노에 희생이라도 돼어야 할

판국으로 보인다. 가족들은 지금 정신적 공황상태, 패닉 상태이다. 정부도 병신같이

허접질 하는 판국에 정치인이라는 쓰레기들마져 진도 현장을 찾아 가족들의

울분과 비통함에 위로보다는 휘발류를 끼얹는 꼴을 거듭하고 있다.

 

 

 

 

 

 

 

 

 

서남수 교육부장관이란 자는 그 현장에 가서 가족들이 피끓는 마음으로

찬바닥에 앉아 구조소식을 뜬눈으로 기다리는데 푹신한 상석 깔고 앉아 라면인지

국수인지 처먹고 왔다고 한다. 모 하나 도움 안되는 색히들이 꼭 무슨 일만

터지면 그야말로 유세를 떤다. 어차피 한반도에서 전시상황이 벌어지면 세월호 선장

이준석 처럼 제일 먼저 짐싸서 달아날 종자들 아니던가.

 

이번 사고를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국가비상상황이던 그 어떤 비상상황에서도

상황을 책임져야 할 사람을 제일 먼저 피신시키게 되어있는 모든 메뉴얼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그러면 제2의 이준석, 제3의 이준석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며 국민들에게

최악의 희생을 안겨줄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자들에게서 투철한

직업윤리의식이니 사명감, 희생정신이니를 티끌만치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이타닉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그렇게 전세계인의 추앙을 받으며

가장 존경받는 진짜 바다사나이, 전설의 캡틴으로 남았지만, 침몰한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본받지 말아야 할 부도덕한

선장의 사례로 영원히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선장과 함께 아무것도 한것 없이

살아돌아온 승무원 이 작자들은 오늘 저녁에도 목구멍으로 밥술이 넘어갔나

모르겠다. 뻔뻔한 작자들 같으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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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4.03.22 21:58

태평소에 심취해 한국인이 되어 살다간 원로 국악인 해의만(海義滿) 씨






태평소에 심취해 한국인이 되어 살다간 원로 국악인 해의만(海義滿)

 

 

원로 국악인 '해의만(海義滿)'씨가 지난 3월1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한국전쟁 당시 어둠속에서 들려오던 태평소 소리에 심취해 태평양 건너 동방의

이 작은 나라에까지 찾아와 귀화해 한평생을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전통 국악의 발전과

보급에 힘쓰다 간 이 독특한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진작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얼마전 타계한

원로 국악인 해의만 씨의 이야기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할까 한다.

 

 

 

 

 

 

 

 

 

'국악(國樂)'이란 요즘 세대뿐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에 살고있는 우리의

전통음악임에도 한참을 외면 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계화 열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워낙에 거의 대부분의 대중매체들이 우리의 것을 등한시 하며 돈 되는,

이른바 잘 나가는 음악들만을 선호하다 보니 어쩌면 어릴적부터 아이들이 

서양음악에 쉽게 빠져들게 되는 일이 전혀 이상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어린 세대가 '요즘의 주류 음악들'에 쉽고 빠르게 동화되는 만큼,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것에 대한 소중함과 의미를 제대로 알고 난 뒤에 그리한다면

이 또한 전혀 문제될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교육 현실 자체가 그렇게 밖에

안되다 보니 어느새 등한시 하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심지어 어디가서 국악을

좋아한다라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손가락질 받기 쉬운게 현실 아니던가.

한국 사람이 한국 전통음악 좋아한다는 자체가 이 정도 상황까지 와있다.

 

 

 

 

 

 

 

 

요즘 광고에 잘 나오는 국악신동 '송소희'가 그래서 더 이뻐보이는 이유도

다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누구나 못해서 안달이 난 각종 오디션 프로에서 기교는

있을지언정 그들이 그렇게 혼신을 다해 부르는 노래와 제스쳐들이 나에게는 일말의 감흥이

전혀 와닿질 않는 이유 역시 머릿 속 생각이 이처럼 노인네 사고여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입바른 소리는 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얼마전 타계한 푸른 눈의 원로 국악인이었던

 해의만 씨가 우리의 전통음악 '국악'의 세계화에 한평생을 이바지하던 중에 노환으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순간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자국민들(특히 젊은이들)도 국악을 오히려 창피해 하며 누구도 쉽게 이를 연구하거나

배워보려 하지도 않는 판에 푸른 눈의 이방인이 한국인을 대신해 국악을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했고 평생을 국악사랑과 연구발전에 이바지하며 살다 갔다는

이야기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타계한 원로 국악인 해의만 씨의 본명은 미국명으로 앨런 헤이먼

(Alen Heyman)으로 뉴욕 태생의 이른바 '뉴요커'였다. 그런 해의만 씨가

한국을 알게된건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1953년 위생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들었던 태평소 소리(아마도 북한군 진영에서 들려오던)에 감명을 받았던게

한국과의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4년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해의만 씨는 한국 유학생과 교류하며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으며, 급기야 1960년 그토록 오고싶던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원래 진작

오고 싶었으나 당시만 해도 민간인 신분으로 이 낯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 

입국허가가 쉽게 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안된 분단국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다시 오게된 해의만 씨는 한국국악예술학교에 들어가 

국악을 배우는 동시에 전통 음악과 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한국삼천리가무단'이 1964년 미국 27개 대학과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73년 국립국악원 연주단과 함께 이란, 프랑스, 서독 등에서

공연과 함께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건 1995년. 미국식 이름 

'앨런 헤이먼'에서 해의만(海義滿)으로 바꾼 것인데 서울 해씨의 시조라고 한다.

'해의만'이란 이름을 쓰게 된건 1960년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오던 길에 만난

선교사를 통해 한국식 이름으로 바다 '해(海)'자에 '옳은 일로 가득

차라'는 의미에서 '의만(義滿)'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 2008년 캐나다 퀘백에서 있었던 세계군악대회에서 '태평소'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어쨌든 해의만 씨는 그렇게 팔자 없었을 지도 모를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역 땅과 인연을 맺었다. 총성이 오가는 전쟁통에 우연히 들었던 태평소 소리가

그의 영혼을 뒤흔들었던게 분명하다. 훗날 모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국의 전통음악인 국악이 왜 좋은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음악은 아주 즉흥적이면서도 기쁨과 슬픔 등 인생의 혼이 담겨 있어요.

서양음악은 4분의3박자인 경우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똑같이 반복되지만, 한국의

민속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반복 없이 진행됩니다. 넓은

사상이 있어요. 각 지역의 서민들의 삶이 담겨 있지요."라고 말이다.

 

 

 

 

 

 

 

해의만 씨는 그렇게 한국인들도 구닥다리라며 외면하던 전통음악에 대해

수십 년간 국악 자료 수집에 몰두하며 공을 들이는 삶을 살았다. 2010년 '서애악부',

'정축진찬의궤', '설중회춘곡' 등의 악서와 고서, 1960년대 국악 연주 녹음 자료 등

희귀 자료 60점을 국립국악원에 기증하기도 했으며, '삼천리 나라의 무용'(1964),

'한국판소리해설'(1972) 등 저서 5권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국악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국제문화협회 문화상(1982),

한국 유네스코위원회 문화상(1991), 국무총리 표창(1995), 은관문화훈장(2011)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옥자 여사와 아들 성광(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

선주(개인사업), 딸 람(캐나다 요크대 교수)씨가 있다.

 

 

 

 

 

 

이제 故人이 된 해의만씨에게 한국인들도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

한 국악을 사랑하고 아끼고 발전 및 전파하는데 한 평생을 바친데 대해

국악계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깊이 머리숙여 감사한다.

 

 

 

 

 

 

 

 

 

해의만
국악학자
출생:1931년(미국)
사망:2014년 3월 1일
수상:2011년 은관문화훈장
1995년 국무총리 표창
1991년 한국유네스코위원회 문화상
1982년 한국국제문화협회 문화상

 

 

[참고자료]-[김문이 만난사람] ‘푸른 눈’ 원로 국악학자 해의만의 국악사랑 50년(20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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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3.12.06 20:02

넬슨 만델라 타계, 흑인인권운동가이자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넬슨 만델라 타계, 흑인인권운동가이자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넬슨 만델라 타계 소식에 전 세계인의 애도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헐리우드의 유명배우 중

한 사람인 모건 프리먼과 흡사한 외모를 가지기도 했던 넬슨 만델라가 타계한건 지난 6월 폐

감염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지난 9월 호조를 보여 퇴원했으나 병세가 깊어져 오늘 12월5일

사망한 것이다. 이로써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인권 운동에 힘썼던 위대한

정치가였던 넬슨 만델라의 타계 소식에 전 세계 인권운동가는 물론이고 자유를 갈망하는 수많은

지구촌 자유주의자들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안갈 정도의 상황이 벌어졌다.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18일생으로 올해 96세를 일기로 타계한 것인데, 그는 평생을

인종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한 공로가 인정되어 지난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넬슨 만델라 타계 소식에 영화 '우리가 꿈꾸는 기적 : 인빅터스'를 통해 넬슨 만델라와 인연을

쌓은 헐리우드 스타 배우 모건 프리먼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 우리는 지난 세기의 진짜 거인을

잃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예의 인물이며, 정복할 수 없는 힘, 타협하지 않는 결의를 가진

사람이다. 자유와 인간 존엄을 소중히 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웅이다'라는 장문의 추도 글을

올리기도 했는데, 모건 프리먼은 그만큼 넬슨 만델라와 여러면에서 외모도 닮은 스타일인데다

그의 철학에서부터 이념까지 존경을 아끼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넬슨 만델라 타계를 즈음해서 그의 생애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다.

넬슨 만델라는 1918년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템부족(族)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시위를 주동하다 퇴학당한 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청년연맹을

창설하였다. 1952년 비백인(非白人)으로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상담소를 열고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반대운동에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하였다.

 

 

 

 

 

 

 

또 넬슨 만델라는 1952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체포되기도 했는데 1960년 3월

통행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던 흑인 69명이 무차별 사살된 샤프빌 흑인학살 사건을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게 된다. 만델라는 61년 지하 무장조직인

'움콘토 웨 시즈웨'를 결성해 전국적인 파업과 게릴라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흑인 해방을 위해 무기를 든 지 17개월 만인 62년 8월 체포된 넬슨 만델라는

1964년 6월 리보니아 재판소에서 국가 전복기도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상(賞),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받았으며, 1990년 2월 석방때까지 27여년간을 복역하면서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1991년 7월 ANC 의장으로 선출된 뒤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하여 드 클레르크의

백인정부와 협상을 벌여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93년 드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1994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참여 자유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다인종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일반적인 우려와 달리 유혈참극을 거치지 않고 남아공을 소수백인지배에서 민주주의로

전환시킨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1999년 6월 퇴임했다. 저서로 자유를 위한 투쟁

의지를 밝힌'투쟁은 나의 인생:The Struggle is My Life'(1961)과 자서전 '자유에의 먼 도정:

Long Walk to Freedom'(1995) 등이 있다. 넬슨 만델라 타계 소식은 역시도 자유를 갈망하는

전 세계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희망과 아쉬움을 동시에 남겨주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넬슨 만델라 타계 소식에 고인의 명복을 빌어 본다.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
전 국제기관단체인, 전 정치인
출생:1918년 7월 18일(남아프리카공화국)
사망:2013년 12월 5일
학력비트워터스랜드대학교 법학 학사
수상2006년 국제 앰네스티 양심대사상
1993년 노벨 평화상경력1998.09~1999.06 비동맹운동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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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3.10.29 22:38

김주하 아나운서 하차, 시어머니와 신랑의 폭력 앞에 무너지나






김주하 아나운서 하차, 시어머니와 신랑의 폭력 앞에 무너지나

 

김주하 아나운서가 하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요며칠 전부터 난데 없이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오는 바람에 설마했었는데 김주하 앵커의 이혼소송, 결혼9년만에 파경위기 등의

헤드라인 뉴스는 루머도 아니었고 오보도 아닌 사실이었다. 외모만 보아서는 모든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뭐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완벽하기만 한 김주하 앵커였는데 참 안타깝게 됐다.

실제로 지금도 여대생들에게는 가장 닮고 싶은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이런 날벼락 같은 소식이 더더욱 믿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김주하 아나운서의 경제뉴스 하차 소식은 오늘 나온 소식이지만, 세간의 사람들은

완전무결에 가깝던 MBC의 간판급 스타 아나운서가 왜 갑자기 그런 이혼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더 궁금해하는 분위기였다. 확실한 내막은 워낙 사생활 노출을 꺼리는 부분도

있고 유명인사이다 보니 더더욱 외부시선에 부담을 느껴 잘 알려진게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흘러나온 보도들만 들여다 보아도 김주하 아나운서가 겉으로 대중들에게

보여졌던 모습과 달리 사생활에 있어서는 남편의 상습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최근 미국에 사는 시어머니까지 가세함으로써 폭행을 둘러싼 시비가 불거지기도 했다.

 

 

 

 

 

사람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는 하지만, 김주하 아나운서는 그래도 어쨌거나

상징적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있어 다른 세상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반인들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를바 없는 그런 일들에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씁쓸한 마음이앞선다.

전문가들은 김주하 앵커 처럼 사회적 성공과 지위를 누리는 전문직 여성들일 수록 이번에 알려진

바와 같이 가정폭력이나 가정불화설에 더욱 민감하다고 전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만 놓고 보아도 자신의 흠결이 대외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칫 가정폭력과 같은 문제들이 내부로 더 곪아 기어이 이번 일 처럼

급기야 더 이상 감추거나 피할 수도 없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 최근 김주하 아나운서 하차 소식과 함께 들려온 이야기들

 

어쨌든 김주하 아나운서의 사생활에 대해서 더 이상 궁금해 할 필요도 없지만 오늘

김주하 아나운서가 하차했다는 소식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김주하 앵커의 후임으로 유선경

아나운서가 MBC의 '경제뉴스'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유선경 아나운서는 프리랜서이다. 

그리고 김주하 앵커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현재 소속 부서인 인터넷 뉴스부 업무를
맡게 될 것이라고 전해졌다. 참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ㅠ.ㅠ

 

 

 

 


김주하
방송기자, 전 앵커
출생1973년 7월 29일(서울특별시)
소속MBC (기자)
가족배우자 강필구, 아들 강준서, 딸 강준
학력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학 학사
수상2009년 제2회 더 우먼 오브 타임 어워드 올해의 여성상
경력2013.04~ MBC 뉴미디어국 인터넷뉴스부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1997년 11월 MBC에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입사 후 2000년 10월까지 굿모닝 코리아, 피자의 아침 등의 보도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2000년 10월

30일부터는 MBC 뉴스데스크의 평일 앵커로 활동하였다. 앵커 활동 중 2004년 6월에는 아나운서국

소속 아나운서에서 사내 직종 전환을 통해, 보도국 소속 기자로 전직하였다.
이후 출산 휴가문제로 2006년 3월 3일, 결국 MBC 뉴스데스크의 평일 앵커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2007년 3월 17일, 정확히 1년 만에 주말 뉴스데스크의 단독 앵커로 발탁되었다.
이후 1년여간을 진행해오다가, 2008년 3월 24일부터는 육아문제와 관련한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MBC 뉴스24로 자리를 옮겨서 해당 프로그램을 단독 진행하였으나, 2011년 12월 7일의

둘째 아이의 출산 준비를 목적으로 2011년 11월 18일의 뉴스 진행을 끝으로 하차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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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3.10.14 10:00

돈 라폰테인(Don LaFontaine), 헐리우드 영화 예고편의 바로 그 목소리 주인공






돈 라폰테인(Don LaFontaine), 헐리우드 영화 예고편의 바로 그 목소리 주인공

 

돈 라폰테인(Don LaFontaine)이 누구인지 이름만 들어서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헐리우드 영화의 예고편에 흘러나오던 매우 익숙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왠만한 사람들은

모두들 "아~! 그 사람!!"하면서 바로 알아듣는다. 지난 2008년 9월1일 타계한 돈 라폰테인은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무려 5천여편에 달하는 헐리우드 영화 예고편에서 전문 나레이터로 활약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얼굴은 몰라도 목소리만큼은 확실히 기억한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예고편을 통해 매우 익숙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돈 라폰테인이 사망한 뒤로는 다른 이가 바톤을 이어 받았지만, 일단 굉장히 오랜 세월 카리스마

넘치던 듣기좋은 그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전 세계 영화팬들이 매우 아쉬워 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90년대 영화를 주축으로 영화들 소개를 하면서 메인 예고편을

꼭 첨부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많은 영화 예고편에서 돈 라포테인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전히 도대체 어떤 목소리인지 감이 안오는 분을 위해 아래 영상을 소개한다.

딱 한 구절만 들어보아도 아~ 이사람이라고 바로 알아보게 될 것이다.

 

 

 

▲ 돈 라폰테인(Don LaFontaine)의 목소리는 바로 이런것이었다.

 

그만큼 돈 라폰테인이 헐리우드 영화사에 있어 예고편을 소개하는 나레이터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것은 어쩌면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확실히 일찌감치 우연찮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

가능성을 발견했고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정확히 쏟아부어 기량을 펼쳤기 때문이다. 돈 라포테인 말고도

분명 목소리 좋은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보다 더 목소리 괜찮은 성우들도 있을 것이고 그런 재능을 다른 쪽에

쓰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운이 좋았다라는 부분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돈 라폰테인은

확실히 그가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열심히 재능을 발휘하며 정진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목소리를 타고 나는 것은 솔직히 엄청난 행운이다. 가수를 해도 기왕이면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진 좋은 음성을 가진 가수가 좀 더 유리한 이유도 이때문이다. 발성법이 좋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그런것들은 어차피 갈고 다듬어야 할 부분이고 노력하면 개선이된다. 돈 라포테인은 비록 2008년 68세의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나 더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사는 동안 그는 확실히 전 세계

수많은 영화팬들에게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분명하게 족적을 남겼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영화 이야기를 주로 쓰면서도 어찌보면 이 사람에 대한 소개가 너무 늦은 감도 없잖은데

어떤 영화를 또 포스팅할까 하면서 지난 90년대 영화들을 둘러보던 중 이 사람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고

생각한건 사실 좀 오래되었다. 어쨌든 1963년부터 상당수의 헐리우드 영화 예고편에 그의 목소리가

삽입되기 시작한건데, 한창 잘 나갈 때는 하루에만도 25작품의 예고편 작업을 했고 한 작품당 걸리는 시간은

약15분 정도에 편당 2천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한 해 수익은 천문학적인 숫자였다고 한다. 

 

 

 

▲ 돈 라폰테인(Don Lafontaine) 생전 인터뷰


돈 라폰테인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의 경제 용어 이야기 하나를 또 빠뜨릴 수가 없는데,

참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어 소개한다.  즉, '라폰테인 효과'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흔히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마인드를 이야기 할 때 자주 쓰인다고 한다. 요지는 '검증되지 않은 신인에게 모험을

거느니, 차라리 믿을만한 사람을 계속 기용하라'는 뜻을 담고있다. 어찌보면 그냥 평범한 말인데, 그만큼

실효성에 있어 그게 더 낫다는 의미이겠다. 왜 그동안 돈 라포테인이 헐리우드 영화 예고편을

독점해 왔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또 있을까. 진작에 포스팅 했어야 할

전설적인 헐리우드 영화 예고편의 목소리 주인공 돈 라폰테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돈 라포테인

Don LaFontaine

영화 프로듀서, 성우, 배우

출생:1940년 8월26일(미국 미네소타)

사망: 2008년 9월1일

 

미네소타의 덜루스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부터 보이스 액팅에 관연한 것은 아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입대했고 그 곳에서 군악대의 레코딩 엔지니어로 이 계통에 발을 들여놓았다.

제대후 뉴욕으로 옮겨 내셔널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사운드 엔지니어로 일한 그는 1962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Dr.Strangelove'의 라디오 광고를 만들었던 플로이드 페터슨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몇년 후 그들의 회사는 급속히 성장해 30여명의 직원과 자신들의 빌딩을 소유할 정도로 영화 광고계에서는

첫 손에 꼽힐만큼 크게 성공한 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1965년에는 드디어 전설의 목소리, 예고편의 제왕

돈 라폰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가 MGM(Metro Goldwyn Meyer)에서 제작한 웨스턴무비

'Gunfighters Of Casa Grande'의 라디오 광고를 만들기위해 처음 목소리를 삽입했는데, 이를 계기로

오늘의 전설적인 돈 라포테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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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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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9.25 22:18

'별들의 고향'으로 7.80년대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누린 소설가 최인호 별세






'별들의 고향'으로 7.80년대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누린 소설가 최인호 별세

 

이 시대 최고의 대중 소설가로 손꼽히던 작가 최인호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향년 68세의 조금은 이른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최인호 작가는 1973년 '별들의 고향'을

통해 본격적인 대중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왔다. 그가 집필한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 되었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만큼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소재와 더불어 시대상을 담아 글로 표현해 온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별세한 이후에도 영원히 세상에 진한 발자욱을 남겼으리라 짐작해 본다.

 

 

 

 

어떤 면에서는 죽기 전에 이러한 작품을 남기고 간다라는 게 개인적으로 몹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그냥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바둥바둥 살다가는 세상에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않고 가버리게 되니 말이다. 최인호 작가의 별세 소식과 함께 돌연

인생무상함 마져 느껴본다. 아마도 세월이 그만큼 유수와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보니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정말 많은 유명인사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정작 죽어야 할 인간들은 천수를 누리고 오히려 좀 더 우리 곁에 오래 남아주었으면 하는 아까운 사람들이

자꾸만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만 더해온다. 이번에 역시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설가 최인호씨 마져 별세했으니 그 다음은 또 누가 될지 불안함이 앞설 판국이다.

그만큼 개인적으로도 빠르게 세월을 따라 멀리도 달려왔으리라.

 

 

 

 

 

 

9월25일 저녁 7시10분 지병으로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씨는 1982년 '깊고 푸른 밤'을 통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깊고 푸른 밤'은 안성기, 장미희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영화 또한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보면 거의 대부분의 내놓는 작품들이 모두 영화화

되었을 정도로 7.80년대는 그야말로  소설가 최인호의 시대였고 그의 작품은 영화와 더불어

한층 더 유명세를 떨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씨의 저서를 단 몇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그나마 영화작품을

통해서라도간접적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경험한 것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우던 소설가 최인호씨는 2008년 5월 침샘암 발병 이후 5년째 투병중이었다.

그 '영원한 청년작가'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렇게 68세의 일기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데

대해 문학인을 비롯해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67년 연세대학교 영문과 재학 중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최인호 씨는 '별들의 고향' '겨울나그네'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가 쓴 작품들은 소설로서의 인기 뿐만 아니라 드라마·영화·다큐멘타리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청년문화의 대변자'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년 전에는 투병 중에 완성한 장편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최인호

崔仁浩
소설가
출생:1945년 10월 17일(서울특별시)
사망:2013년 9월 25일
학력:연세대학교 영문학 학사
데뷔: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선
수상:2011년 제14회 동리문학상
경력:1999.10 미주 순회 한국현대문학낭독회

 

작품활동


1967 조선일보 신춘문예 '견습환자'로 문단 데뷔
1970 술꾼, 모범동화
1971 타인의 방(현대문학상 수상)
1973 병정놀이
1973 별들의 고향
1973 바보들의 행진
1974 죽은사람
1976 도시의 사냥꾼
1977 가면무도회, 다시 만날 때까지
1978 돌의 초상
1978 천국의계단
1979 불새
1979 적도의 꽃
1981 지구인
1982 깊고 푸른 밤(이상 문학상), 위대한 유산
1982 고래사냥
1983 겨울나그네
1985 잃어버린 왕국
1993 길 없는 길
1997 사랑의 기쁨
1999 내 마음의 풍차
2000 상도
2003 해신
2004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2006 유림
2008 머저리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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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9.02 16:06

미야자키 하야오 은퇴 이유, 일본의 우경화와 구제불능의 역사인식에 대한 소회의 결과






미야자키 하야오 은퇴 이유, 일본의 우경화와

구제불능의 역사인식에 대한 소회의 결과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이전에도 이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오는가

싶었는데, 결국 오는 9월6일 도쿄에서 공식기자회견을 갖고 공식 은퇴를 선언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지금까지의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드러났던 평화주의적인 철학관을 가지고 있는

예술인 중 한 사람이다. 그동안 재패니메이션이라고 해서 그의 작품들 중 상당수를 탐닉해 온 매니아들

중에는 이런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들이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많다.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갑작스러운 은퇴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도 미야쟈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을 제일 처음 접한게 80년대 초였는데

그 작품은 이름하여 '미래소년 코난'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정말 당시엔 그의 이런 작품들이

자라나는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아름다운 동화적 소재들을 통해 꿈과 이상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은 원화 이미지부터가 보는 것만으로도 어릴적 잃어버렸던 동심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는 이처럼 심플한듯 담백한 느낌의 이미지와 더불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많은 작품들을 전 세계 팬들에게 선사해왔다.

그의 작품을 만난다라는 것만으로도 왠지모를 행복감과 감성적 설레임이 분명 있었다.

 

 

 

 

그랬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것은 여러 추측들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최근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기점으로 과거 역사에 대한 참회는 고사하고 오히려 빠른 속도로 우경화하는

분위기에 지식인(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그리 결심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앞서 말한대로 그는 일본인이지만, 분명 평화주의자이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난 달 일본에서 열린'‘바람이 분다' 기자간담회에서 "과거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일본 정부가 일본인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한다"며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그는 평소 전쟁을 반대해 왔고

원전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반대 활동도 해왔다. 그리고 전세계인이 우려하는 일본의 우경화에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동안 ‘미래소년 코난’,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의

작품으로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고 있었다. 어느덧 72세를 맞이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로써 오는 6일 기자회견을 갖고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할 예정이다. 전문가들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갑작스런 은퇴에는 최근 일본 보수 정권의 잇따른 우경화 정책과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2차 대전 침략국으로서 최소한의 염치도 지키지 않는 현실에 대한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또 최근 이런 말도 덧붙였다. "현재 일본 젊은이들은 역사 감각을

잃었다. 그걸 잃으면 그 나라의 균형이 깨진다. 위안부 문제도 이미 일본이 청산을 했어야 한다.

'하시모토 담화'라는 식으로 또 다시 오르내리는 것은 굴욕이다"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로 오는 5일 개봉하는 '바람이 분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네티즌들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갑작스러운 은퇴에 매우 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미친듯 우경화를 달려가는 일본의 모습이 결국 평화를 사랑하는 한 예술가의 작품에 대한 의지마져

꺾어놓고 말아버린 듯하다. 하지만, 이런 고백으로 하여금 보다 많은 세계인들이

일본의 우경화에 우려를 넘어 실망 그 이상으로 그냥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참고] 관련 사이트 모음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는 OST가 더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이웃집의 토토로-미야자키 하야오의 영원한 걸작

 

'온유어마크(On Your Mark)',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차게 앤 아스카(CHAGE and ASKA)의 뮤직비디오

 

 

 

 

 

 

 

 

 

 

미야자키 하야오
(みやざきはやお, 宮崎駿)
애니메이션감독
출생1941년 1월 5일(일본)
가족아들 미야자키 고로
학력가쿠슈인대학 정치경제학
데뷔1978년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
수상2006년 제31회 LA영화비평가협회상 애니메이션상
경력1985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1941년 1월 5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출생하였다. 고등학교 때 이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심하였으나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대학시절 청소년 신문에 만화를 기고하였으며 1963년

졸업 후 도에이 동화[東映動畵]에 입사하여 뒷날 동업자가 된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의 작품에 메인 스태프로

일하다가 A프로덕션으로 옮겨 TV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 未來少年 コナン'(1978)으로 데뷔하였다.

 1년 후 연출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루팡 3세 : 칼리오스트로성의 비밀 ルパン三世 : カリオストロの城'과

다음 작품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風の谷の ナウシカ'(1984)의 흥행 성공으로 확실한 입지를 구축한 미야자키는

다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 Studio Ghibli'를 설립하여 '천공의 성 라퓨타

天空の城ラピュタ'(1986)와 1980년대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꼽히는 '이웃집 토토로 となりのトトロ'(1988),

사춘기 소녀의 심리를 묘사한 '마녀 우편배달부 魔女の宅急便'(1989), '붉은 돼지 紅の豚'(1992) 등을

발표하였다. '마녀 우편배달부'와 '빨간 돼지'는 상영된 그해 일본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하였고,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여 만든 '원령공주 もののけ姬'(1997)는 제작비 20억 엔을 투자하여 14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이후 2000년 대 들어와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고양이의 보은'(2002),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벼랑위의 포뇨'(2008), '마루밑 아루에티'(2010), '코쿠리코 언덕에서'(2011)등을

선보이며 보다 더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고 2013년에는 '바람이 분다'를

통해 또 한번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보이려 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
風立ちぬ, The Wind Rises, 2013

일본
상영시간:126분
개봉:2013년9월5일

감독: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 宮崎駿)

안노 히데아키(Hideaki Anno-지로 목소리),

타키모토 미오리(Miori Takimoto-나호코 목소리)

 

 

▲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作이 될 수도 있는 2013년 9월5일 개봉작 '바람이 분다'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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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People)/유명인사 2013.08.28 10:14

최일구 前 앵커 회생 신청 소식, 결국 보증이 문제인가






최일구 前 앵커 회생 신청 소식, 결국 보증이 문제인가

 

최일구 전 앵커가 회생 신청을 했다는 좀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언제나 '보증' 한번 잘 못 섰다가는 빚잔치에 얽히기 쉬운데 최일구 전 앵커도 이 때문에 회생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무려 30억원대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친형의 부동산과 출판사를 운영햇던 지인의

공장부지 매입사원 등에 연대보증을 잘못 섰다가 그리 되었다고 한다. 앵커도 월급쟁이이고 그나마

최일구씨는 현재 앵커도 아닌 상황에서 맞이한 상황이니 회생 신청이 불가피했을 듯 하다.

 

 

 

 

뉴스 앵커 중에도 스타급인 사람들이 종종 있어왔다. 특히 MBC쪽에 그런 앵커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엄기영 전 앵커도 그렇고 김주하,백지연,손석희 등등

비교적 MBC 쪽엔 유명인사가 많았다. 30억원의 빚 때문에 최일구 전 아나운서가 회생 신청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래도 그동안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앵커답지 않게 뉴스말미에 훈훈한 웃음을

선사해주기도 했던 그런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주변에 어려운 상황에

놓인 가까운 지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최일구 전 앵커를 좋아했던 팬들이라면

이번 최일구 회생 신청 소식을 접하며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 MBC뉴스데스크 전 앵커 최일구 어록 모음

 

한 때 최일구 전 앵커는 '최일구 어록'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앵커에 대한

선입견을 날려버리는 재미난 멘트를 많이 남겼었다. 그래서 2000년대 초중반 이를 두고 말들이

많았었다. 권위적인걸 좋아하는 영감님들은 "앵커가 그게 뭐냐, 전혀 앵커답지 않은 처사'라며

반발했고 혁신을 좋아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뜨거운 인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지금의 MBC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와는 다르게 본질이 타락해버린 방송국이라고 생각해 MBC 뉴스는 아예 보지도

않고 있지만, 최일구 전 아나운서는 입 바른 소리, 할말은 한다는 언론인으로서 어쩌면 마지막

보루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본다. 지금의 MBC는 완전히 변질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30억 빚 때문에 결국 지난 4월 최일구 전 앵커는 개인 회생을 신청했고 이미 지난 5월

법원은 최일구의 개인회생 신청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미 한참 지난 소식인데

왜 이런 소식이 지금에서야 뜬걸까. 요것도 매우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최일구 회생 신청’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 반응은 으례 온라인 뉴스가 그러하듯 뻔한 반응을 보이는 분위기이지만, 정말 한 때나마

색다른 뉴스를 기대했던 팬들 입장에서는 최일구 전 앵커의 회생 신청 소식이 씁쓸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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